광기(狂記)

김무명 edited by 지다율

북(北)보기

TV를 틀었다. 5번, 11번, 24번… 너도나도 떡국을 먹었다는 둥, 새해에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 같다는 둥 똑같은 얘기만 해 댄다. 작년에 봤던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얘긴 똑같다.

나와 상관없는 이벤트가 된 지 오래다. 광화문으로 출근한 지 3년째. 1월 1일은 나에게 손꼽히는 중요한 날이다. 저들이 일출을 보러 가고 떡국을 먹듯이 나는 빈속에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차에 시동을 건다. 텅 빈 세종로를 달리는 찰나의 행복도 잠시, 나는 그를 만나러 간다. 아니, 그 방송을 시청하러 간다.

하나둘씩 TV 앞으로 모여든다. 신년 특선 영화를 보려는 게 아니다.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를 보기 위해서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뭐? 대한민국에서 북한 TV를 본다고? 그 뭐냐, 무슨 보안법인가 뭔가 위반 아이가?”라고 말이다.

이 말만 하겠다.

“그러니까 굳이 새해 첫날 아침에 출근이라는 거를 해서, 다 큰 어른들이 TV 앞에 모여서 덕담이랍시고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나 하고 있는 거겠지? 이거라도 해야 밥 벌어먹고 살지 않겠어?”

이 짓도 내년(2019년) 1월 1일이면 네 번째다. 정은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안경을 썼는지, 박수소리 효과음은 몇 번이나 나왔는지, 그런 것도 쓴다. 내가 우습나? 아니, 나 진지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30분짜리 신년사 방송 보고 365일을 예언한다. 점쟁이도 아닌데 북한의 신년 점괘를 내고 앉아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정은이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30분 동안 말한 대로 다 하는 시늉을 한다.

근데 그걸 또 어찌 알고 가끔 속임수도 쓴다. 2016년이었던가, 신년사에서 ‘핵’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 놓고는 엿새 뒤에 핵실험장 버튼을 눌렀다.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그날 휴가였다. 회사 전화를 안 받았다. 진짜 미쳤었나 보다.

공포통치와 리더십

북한밥 3년 먹었다. 북한은 지구밥 70년 먹었다. 70살인데 속된 말로 사람대접 못 받고 있다. 정신 못 차렸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여하튼, 북한을 ‘국가’로 볼지, ‘집단’으로 볼지에 대한 논란은 진행형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북한은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또 유엔에서는 북한이 ‘회원국’이다. 어렵다. 그래서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낸 결론이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다. 답 없는 이야기다.

광화문에 촛불이 타오르기 1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은행 열매 냄새가 코를 찔렀던 때쯤이었다.

“그분이 북한을 엄청 싫어해.”

‘어둠 속에서 빛을 좇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칭하던 사람들. 이렇게 표현하면 아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다. 여하튼, 그때 그들은 참 열심히 일했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말 그대로 ‘정보원’이 돼 있었다. 여차하면 여의도에 가서 “북한 내부에 체제 불안 요인이 가중되고 있다”고 읊어 댔다. 언론에는 누가 숙청당했다더라, 누구는 고사포로 ‘피떡’이 됐다더라는 등의 ‘첩보’를 친절하게 전해 줬다. 그러면서 항상 북한에서는 공포통치가 비일비재하다고 굳이 부각시켰다. 김정은은 광인(狂隣)이었다. 말로만 들으면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VIP가 바뀌었다. 그리고 TV에서만 봤던 그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멀리, 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옥류관 랭면’을 대접했다. 평양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VIP가 북한 주민 15만 명 앞에서 대중연설을 했다. 남북 분단사 최초라고 한다. 세상이 바뀌려 하고 있다.

광화문에서 각종 포럼이 끊임없이 열리는 한 빌딩이 있다. 그곳에서였다, 내 귀를 의심했던 게. 분명 얼마 전까지 북한 ‘피떡 사건’과 ‘엘리트 권력 이탈 징후’ 등의 첩보를 널리 퍼트리던 곳과 연관 있는 단체가 주관한 포럼이었다. 누군가 ‘김정은의 리더십’이라는 표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미치광이의 공포통치’ 정도로 치부했던 게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리더십의 유연함까지 기대할 줄 아는 그 유연함이 미치도록 놀라웠다. 아니면 이들이 누군가의 공포통치를 경험했거나.

노욕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 받는다.”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 〈강철비〉에 나오는 대사다. 445만여 명이 봤으니 줄거리는 많이들 알 거라고 본다. 진부하게 이 대사를 끌어온 이유는 여전히 주변에서 영화 같은 일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기 때문이다.

남북 10·4선언이 발표되고 11년째를 맞이하던 날, 성남 서울공항에서 정부 고위 당국자와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총 160명을 태운 정부 수송기가 이륙했다. 평양에서 열리는 10·4선언 11주년 기념 평양 민족통일대회 남측 참가자들이었다.

여기서 질문, 10·4선언은 무엇인가?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통해 도출해 낸 남북 정상 간 합의서 성격의 선언문이다. 최근의 평양공동선언과 같은 형태로 보면 된다.

진짜 질문, 그럼 10·4선언은 누구의 유산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 NSC 소속 공직자들? 국민? 답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다.

10여 년 전에 국무총리를 했던 한 사람이 있다. 지금은 집권 여당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수개월 전까지는 노무현재단이라는 곳의 이사장을 맡았다. 그런 그가 10·4선언 1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 공동행사에 참여해서는, 북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정권을 안 빼앗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말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구 보라고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힘을 과시했다.

지원군(?) 규모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노무현재단 ‘모자’를 쓰고 방북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지만 명단 전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故) 강금원 씨 부인인 김영란 시그너스CC 대표, 노무현 장학생 출신의 대학생, 조호연 봉하마을 사저 비서실장 등 10·4선언보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선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기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워크숍이라는 비판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코 내가 못 가서 그런 거 아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니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방북을 추진한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북한은 단군절이라고 부른다. 이 행사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행사 일정도 확정됐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행사가 취소됐다. 어떤 힘 있는 곳에서 만류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힘’을 과시한 사람을 만나면 “꼭 그렇게 혼자서 주목받고 싶었냐”고 묻고 싶다.

그동안 보수세력은 북한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을 활용해 왔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청와대 행정관이 중국에서 북한 인사를 만나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국민들이 보수진영 후보를 지지할 거라는 경험(?)에 기반한, 분단을 정치적 이득에 이용하려 한 정치 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렇다고 남북 훈풍 무드에 전직 대통령 지지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추억을 곱씹고, 그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은 정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것도 별로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는다. 누가 그러더라. 노욕이 제일 무서운 거라고.

통일, 꼭 ‘내’가?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여 명의 평양 시민을 앞에 두고 했던 연설의 한 부분이다. 맞는 말이다. 남과 북이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반만년을 함께 산 핏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견이 있을까.

각론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등 돌리고 지낸 7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실향민 1세대였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북의 가족 친척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몽땅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1980년대 이산가족 상봉이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애끓는 신파극이었다면, 2018년의 이산가족 상봉은 <인간극장> 같은 다큐 장르로 바뀌었다. 60 생에 처음 보는 삼촌 사촌 간의 어색한 첫 만남. 그래도 핏줄이 ‘땡긴다고’ 몇 시간의 대화만으로도 마음의 문은 조금씩 열리지만, 이내 작별의 시간을 맞는다. 작별은 여전히 슬프지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절규하는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연인 간의 이별에도, 10년 전 영희랑 헤어질 때도, 엊그제 영숙이랑 헤어질 때도 눈물이 났지만, 다들 일상을 살고 있다. 이산가족들도 일상을 산다. 하물며 북한이 핵을 쏘기 시작할 때 태어난 사람들은 어떨까. 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남’이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는 동안 이산의 아픔은 옅어졌다. 이북에 두고 온 ‘부모님’, ‘아들·딸’은 손에 꼽힐 정도다. 그 빈자리는 남과 북의 5촌, 6촌 친척이 채우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북한은 책에서 배운 한민족이다. 관(官)에서 ‘먼저 온 통일’이라고 계몽하는 탈북민들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통일을 ‘소원’이 아닌 ‘증세’로 읽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다.

통일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총부리를 거두고, 철망을 걷고, 여권에 스탬프 찍어 가면서 왕래하다 보면 내 자식은, 아니면 내 손주는 남북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눴던 오늘을 책으로 배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은 대립과 반복의 21세기를 청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통일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도.

전하지 않을 편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 선생, 남측 김 아무개라고 합니다. 〈로동신문〉 선생들이 매번 이름 앞에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라고 불러 주겠지만, 남측 기사에는 ‘님’자도 안 붙입니다. 그러니 그냥 하던 대로 ‘김 선생’이라고 칭할 테니 이해 바랍니다.

김 선생 소식은 〈조선중앙방송〉과 〈로동신문〉으로 익히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던 그 순간, 싱가포르에서 야경을 보러 외출하던 그 순간에는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했습니다. 김 선생의 부하 직원들 중에 혹시 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유야 어찌 됐든 김 선생이 더 이상의 핵 무력 고도화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하니 안도감이 듭니다. 지인들에게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당신이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까지 쏘아 올렸던 그날 막연한 불안감이 커졌던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김 선생은 그날 “핵 무력이 완성됐다”고 밝게 웃으며 말했었죠.

김 선생이 가끔 억울해한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비핵화를 약속했는데 왜 다들 믿지 않냐고 토로했다죠?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당신도 왜 미국이, 왜 한국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겠죠. 김 선생의 할아버지 때도, 김 선생의 아버지 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김 선생 집안의 잘못을 탓하자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인내와 신뢰가 부족했던 게 안타까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김 선생이 이런 난관이 또다시 생길 것을 예상하고 있고, 그럼에도 극복하겠다고 말하고 있기에 나는 믿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김 선생 자녀가 셋이라고 들었습니다. 집에 가면 한창 재롱도 부리고 하겠죠. 당신의 아들과 딸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당신이 지난 1년간 보여 준 말과 행동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는 걸 꼭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때론 섭섭하고 화도 나겠지만 서로 등 돌리고 산 세월의 대가라고, 넓은 마음으로 ‘평화’라는 본질만을 봐 줬으면 합니다.

김 선생이 서울에 한 번 들르겠다고 얘기한 걸로 들었습니다. 이 글이 종이에 찍혀 세상에 나올 때쯤이면 당신이 이미 서울을 왔다 갔을 수도 있겠네요. 부디 좋은 만남이 되길 바랍니다. 혹시나 기회가 된다면 ‘수고 많은’ 기자 선생들과 잠시 이야기 나눠 보는 것도 생각의 폭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큰 기대는 안 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김 선생이 애연가라고 들었습니다. 듣자 하니 지하철에서도 피우고,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도 피우고 그런다지요. 남측에서는 요즘 담배 피우는 사람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모든 식당은 당연히 ‘금연구역’이고요, 웬만한 호텔도 ‘금연’입니다. 그렇다고 담배 피우자고 밖으로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처지도 아닐 테니, 방을 얻을 때 꼭 ‘흡연방’인지 확인하고 들어가길 바랍니다. 그럼 큰 구설수에는 오르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