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궁금하지 않아서

지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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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잤지?

후배는 이미 술에 취한 A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A는 아까부터 고개를 꾸벅거리더니 지금은 아예 엎드려 자고 있다. 얼마 전부터 그를 이따금씩 만난다. 남들 하듯 같이 영화 보고 밥을 먹는다. 술을 마실 때도 있다. 그러다 몇 번 자기도 했다. 하지만 사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귀지 않기로 했다.

선배, 쟤랑 잤냐고!

내가 대답 없이 연신 술만 들이켜자 후배는 재차 물었다. 아니, 다그쳤다고 해야 할까. 후배의 얼굴이 제법 상기됐다. 오늘은 대답을 기필코 들어야겠다고, 듣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도 않겠단다. 얘는 왜 이리 궁금한 게 많을까.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직업병일까. 후배는 기자다. 참을성 없고 묻고 따지기 좋아한다. 그런데 왜, 이런 것까지 궁금해하는 걸까. 그걸 안다고 니 맘이 편해지니, 아니면 기사 쓰는 데 도움이라도 되니. 나는 소주병을 수직으로 세워 마지막 한 방울까지 후배 잔에 털어 넣어 주었다.

잔 비우고 일어나자.

비슷한 소리를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A의 자취방에 누워 문득 생각했다.

지도교수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교수의 지도제자들이 대부분 참석해 술집을 통째로 빌려야 했다. 다들 축하하고 기뻐했다. 아니, 그런 척했다. 모두 내심으로는 저 쓰레기가 오늘은 어떤 행패를 부릴까, 끝내는 또 누구를 데리고 나갈까 생각했다. 공포와 호기심, 혐오와 질시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여제자들은 돌아가며 교수 잔을 채우기에 바빴고, 남제자들은 교수의 비위를 맞추느라 분주했다.

나는 무심하고 평온했다. 저 남자가 누구와 자든 관심 없었다. 아니, 세상사람 누가 누구와 자든 나는 상관없었다. 그게 나여도 그랬다. 나도 교수랑 몇 번 잔 적이 있다. 논문 심사가 코앞이었다.

너 저년이랑 잤잖아.

자리를 옮기고 옮겨 4차로 자리 잡은 맥줏집에서 교수가 말했다. 엉망으로 취해 혀가 꼬인 와중에도 교수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나와 잤다고 지목된 남학생은 얼굴이 벌게진 채 고개를 수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잘못한 걸까? 잤으면 뭐가 어때서? 자기는 아내 아닌 여자하고 많이 자잖아? 그게 직업여성이든 제자이든. 아니, 아내 아닌 여자랑만 자던가. 심지어 그 학생은 나하고 자지도 않았다.

K가 눈에 들어왔던 건 그때였다. 그는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교수와 친분이 있는 자기 선배를 따라왔다고 했다. 선배는 문학평론가로 글은 안 쓰고 주로 술만 마시는 사람이라고, 자기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거라고 넉살 좋게 자기소개를 하던 그였다. 나는 금세 그를 잊어버렸는데 그는 줄곧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그가 나중에 고백했다. 그러다 교수가 돼먹지 못한 소리를 자꾸 내뱉자 자기도 모르게 폭발했다나 뭐라나.

이 씨발 교수님아, 그만 좀 하시죠?

교수는 풀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좌중이 일순 고요해졌다. 그를 데려온 평론가만이 상황 파악 못 하고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치근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K는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더니 잠시 두리번거렸다. 아 여기 있네 소주병, 시인님(그는 ‘소주병’과 ‘시인’을 교묘히 이어 붙였다), 받으세요. 응? 방금 욕이…. 아, 어서요, 20세기(그는 ‘20세기’를 교묘히 발음했다) 최고 시인을 이렇게 뵙다니 영광입니다. 21세기가 된 지가 언젠데…, 어쩌고 하면서도 교수는 거듭되는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채워 주는 족족 잔을 비웠다.

이런 대견한 청년이 다 있군, 그 학교 있지 말고 내 밑으로 오게, 내 등단도 시켜 주고 강의도 시켜 줌세. 평소 술만 취하면 제자들에게 남발하던 말을 얼마간 중얼거리다 교수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 꼴이 하도 우스워, 나는 히히히 웃어 버렸다.

뭐가 그렇게 웃겼어요?

다시 만난 K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글쎄요.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렇게 얼버무렸다. 시간이 지나면 소리만 남고 감정은 사라진다. 그 기억 속의 소리가 현재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나는 다시 지금 감정으로 그 소리를 해석할 뿐이고. 감정은 소급 적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때• 감정은 그•때•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남은 건 오직 소리뿐.

기억 안 나요? 웃은 거?

내가 갸우뚱하며 다시 한번 글쎄요, 하고 말하자 그는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에이, 왜 웃는지 알고 싶어서 연락한 건데, 그 와중에 웃은 사람은 S씨뿐이니까, 하고 그는 웃었다.

그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재미있든 재미없든, 친한 사람 앞에서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든 그는 일단 웃고 봤다. 어느 상황이고 웃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듯. 그의 웃음소리는, 약간 늙수그레한 외모와 굵은 저음의 목소리에 참 어울리지 않게도, 방정맞았다. 그는 내 재미없는 얘기에 한참 웃다가 자주 확인했다. 미안해요, 나 또 천박하게 웃었죠? 그렇게 들릴 때도 물론 있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남은 건 오직 소리뿐.

K와 처음 몸을 섞었을 때, 그는 울었다. 남자가 우는 걸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잠자리에서 우는 남자는 처음이라 나는 조금 놀랐다.

괜찮아요?

아뇨.

왜요?

그냥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는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두 손을 겨우 들어 그를 안아 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냥이라. 왠지 설명이 다 된 느낌이었다. 노곤해져 깜빡 잠이 들었다.

히히히.

얼마나 잤던 걸까. 갑작스레 들린 그의 웃음소리에 깨 보니 30분 넘게 잔 것 같았다. 히히히. 아직 내 위에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속았죠? 히히히.

뭐 하는 거예요?

연기한 거예요, 연기, 히히히.

그는 한참을 히히히, 히히히 웃고는 이내 또 사과하고 확인했다. 미안해요, 나 또 천박하게 웃었죠? 나는 고개를 젓고는 먼저 씻을게요, 하며 샤워실에 들어갔다. 흠뻑 젖은 가슴을 잠깐 바라보다 물을 틀었다.

그 책 읽어 봤어요?

K는 자주 물었다. 내가 전공에 관한 것을 겨우겨우 따라간다면, 그는 전공 외의 것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사람들 꼭 있지 않은가. 남이 모르는 것들만 어떻게든 찾아서 읽는 사람들. 그래서 짜잔, 이건 몰랐지 하고 설명하기 바쁜 사람들. 원주민들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해 주는 선교사처럼.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내게는 그리 신선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지식일 뿐이고 책일 뿐이다. 내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는 더더욱.

나는 왜 공부하고 있는 걸까. 이 무익하다 못해 무용한 공부를. 처음엔 무해하고 싶어서였다. 무(無)에 좀 더 가깝고 싶어서. 글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 가 닿으면 나는 남들에게 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나는 여전히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학교에서 조교 노릇을 하고 과외니 알바니 하며 등록금을 충당하지만 생활비까지 감당하기엔 터무니없다. 사회에선 낙오자 취급이다. 학부 전공(경영학)과 다른 학문(문학)을 공부해 보겠다고 대학원 면접을 볼 때 교수는 말했다. 마치 부자 동네에서 가난한 동네로 이사 오는 것 같군. 그런가요. 그렇네. 가난한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축에 속하는 당신은 자꾸 못사는 동네 여자들을 괴롭히고요. 그런가. 그렇죠.

앞으로 내가 가족과 사회, 혹은 민족과 국가(이런 말을 하려니 좀 쑥스럽다)에 기여할 날이 올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러니 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대부분 아뇨, 안 읽었어요, 였다. 왜요? 정말 좋은 책인데, S씨는 생각보다 책을 안 읽는구나. 네, 그리고 앞으로도 안 읽을 거예요, 아마. 그러면 그는 뭔가를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는 했다.

책을 그렇게나 많이 읽었다는 그가 헤밍웨이를 읽지 않았다고 했을 때는 약간 의아했다.

중고서점에 같이 들렀을 때 그는 한참을 떠들다 내가 멈춰선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꺼내 뒤적이고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물고기와 홀로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이야기에서 나는 처참한 사랑의 말로를 본다. 질질 끌고 다니다 뼉다구(‘뼈다귀’가 아니라)만 남아 버린 사랑. 정말 처연하지 않나요?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중히 말을 골랐다. 음, 저, 음. 네? 우물쭈물하던 K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실은 헤밍웨이를 읽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굉장히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빨개질 수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무기여 잘 있거라』도요? 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네. 그는 빨개지더니 잘 익은 사과가 툭, 하고 땅에 떨어지듯 힘없이 말했다.

저는 셰익스피어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왜 묻지도 않은 것까지 자백하며 괴로워하는 걸까. 남들이 읽은 걸 자신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부끄러운 일일까. 어쩌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자체가 그토록 창피한 걸까. 나는 눈앞의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K씨는 생각보다 책을 안 읽었구나.

사과는 며칠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다시 나타난 K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는 평소처럼 인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의 유명한 문학교수에 따르면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그는 대뜸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非)독서와 탈(脫)독서에 대해 한참을 갈파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K더러 헤밍웨이와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곧이어 그는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를 들먹이며 민주주의란 원래 몫 없는 자들의 몫이라면서 자격 없는 자들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배치되는 행태라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나는 당신보고 헤밍웨이와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그는 아는 게 많았지만, 내 생각을 읽을 능력까지는 없었으므로, 계속 말했다. 알아듣기 힘든 외국 사람 이름을 자꾸 들먹이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행복해 보였다.

이름이 뭐라구요?

피에르 바야르와 자크 랑시에르입니다.

피에르 바야르와 자크 랑시에르.

네, 피에르 바야르와 자크 랑시에르.

발음이 웃기네요.

네?

프랑스 사람들은 원래 ‘르’나 ‘크’를 좋아하는 건가. 르, 르, 크, 르. 르, 르, 크, 르. 자꾸 발음하자 입속에 침이 가득 고였다. 르르크르, 르르크르, 르르크르, 하다가 어느새 나는 크르르르, 하고 있었다. K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이래요, 당신이 하는 말들이 대부분 이렇게 들린다구요, 크르르르, 크르르르. 나는 또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메우기 위해 지식으로 두껍고 두껍게 무장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점점 두꺼워지기만 하는 그의 갑옷이 버거워 보였다. 나는 그 갑옷을 좀 벗기고 싶어 그를 만날 때마다 모텔에 갔다.

K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그와 함께 타는 일은 고역이었다. 어디선가 기침이나 재채기 소리가 들려오기라도 하면 그는 웃다가도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물으면 그는 아, 아니에요 하고 자기 나름대로 화를 삭이려고 노력했다. 초반엔 분명 그랬다.

만난 지 두 달이 지나자 그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짜증과 분노를 내 앞에서 드러내는 걸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날은 소요산까지 갔다 오느라 조금 피곤하긴 했다. 체력이 약한 K는 피곤하면 짜증을 더 잘 냈다. 평소 재잘재잘 말 많은 사람이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입 열면 부정적인 말이 쏟아질 게 뻔했으므로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나 역시 피곤하기도 했고.

1호선 지하철이 신도림역을 지날 때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영감 말이야 아까부터 핸드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있어 이어폰도 없는 거야 뭐야 저 교복 입은 여자애들은 왜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야 레즈인가 어 저 봐라 저거 봐 키스하고 있네 더럽게 저 새낀 자꾸 입도 안 가리고 기침하네 이렇게 이렇게 손으로 막는 게 그렇게 어렵냐 병신 마스크를 하든가 아니면 집에 찌그러져 있든가 버러지 같은 새끼 메르스 사태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어 무식한 놈 무식한 연놈들 무식한 어르신연놈들

쉼표 없이 마침표도 없이 그는 자꾸자꾸 말했다. 자꾸자꾸 말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듣지 못한다. 그는 자꾸자꾸 내 귀에, 자꾸자꾸 속삭이듯 험한 말들을 흘려 넣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미워졌다. 자꾸자꾸.

그해 이른 봄에는 저기 남쪽 바다에서 꽃들이 피기도 전에 졌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 왔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꽃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져 버렸지만 나는 한 송이 한 송이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보았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배가 가라앉은 다음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처참하지만 축하해 주기로 했다. 죽음에 둘러싸인 삶이어도 축하는 해 줘야지.

약속 장소에 나타난 K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잠을 못 잔 듯 눈이 벌겠고, 외투와 운동화가 검붉은 얼룩으로 더러웠다. 자세히 보니 양손이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누구 죽이고 왔니? 라 묻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 누구랑 싸웠어? 라 물어 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알지. 너는 술을 먹고 싸웠겠지.) 어제 시 모임 있었잖아, 그 평론가 형이랑. 기억하지? (하지. 그 인간이 그때 치근댔던 애가 휴학했거든.)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한 형이 취해서 자꾸 내 뺨을 치는 거야. 하지 말라고 했지. 근데 자꾸 때려. (….) 화가 난다, 라고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가 그 형을 패고 있는 거야. 패고 있는 걸 깨달았는데도 계속 패는 거야, 내가. (….) 취해서 고꾸라져 있던 평론가 형이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야, 너 뭐야, 지금 선배를 때린 거야? 하면서 내 가슴을 툭툭 치더라고. (….) 난 해명했지. 이 형이 먼저 내 뺨을 때린 거라고. 그러니까 그 형이 뭐라는 줄 알아? (….) 코피를 닦으면서 맞다고, 우리 K한테 뭐라 하지 말라고 하면서 평론가 형을 밀치는 거야. (….) 스무 살짜리 학부생은 취해서 술집 바닥에 그냥 오줌 누고. 히히히, 정말 난장판이었다니까. 히히히, 웃기지?

아니.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안 웃겨, 전혀.

그도 정말 웃기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함께 정색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웃긴 일은 아니야, 정말.

만날수록 그는 바닥이었다, 고 나는 C의 방바닥에 누워 생각했다.

그의 예민함과 괴팍함에 난 점점 지쳐 갔다.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 밥을 먹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때 그는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랬겠지, 나도 내 말에 놀랐으니까. 언젠가 말하려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이렇게 갑자기는.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이라고 답했다.

그냥?

그냥.

그는 밥숟갈을 내려놓고 나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나는 식어 가는 청국장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알 수 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공기가 미세히 떨린다. 그는 침묵으로 말한다. 그리고 빈자리.

나는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박사는 진학하지 않았다. 지도교수는 안타까워했다. 이왕 공부 시작한 거 끝을 봐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그가 정말 안타까워하는 건 따로 있는 것 같았지만, 나 역시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뭔가 싸다 만 느낌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다. 어서 나가야 해서, 잘 싸는 것보다 당장 나가는 게 급해서, 끊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땐 정말 휴지가 많이 든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묻어 나온다. 지금까지도.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 들어갔다. 사회과학 전문으로 제법 유명한 곳이었는데 월급이 이렇게 짠 줄은 들어와서 알았다. 물론 면접 때 액수를 듣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다. ‘세전 백오십’은 실제로 써 보니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벌써 1년 가까이 일했지만 단 한 번도 잔액이 천 원 이상 이월된 적이 없다. 때때로 동생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으니 엄밀히 말해 적자를 내며 일하고 있었다. 내 희망의 잔고도 고작 이러했구나.

그간 K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종종 취해서 늦은 밤 전화를 걸었다. 받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한숨만 푹푹 쉬다 끊거나, 보고 싶다고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리다 끊고는 했다.

한 달쯤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받지 않으려 했다. 한 달이란 그로서는 제법 오래 참았다 싶은 시간이었겠지만 내가 그를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 번을 받지 않자 그는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 전화 좀 받아 줘, 제발. 할 말이 있어. 정말 중요한 말이야.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가 네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받아야 끝날 것 같았다.

잘 지내? 라는 안부로 시작한 대화는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기는 일은 내게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리 그랬었지, 좋았었는데, 그땐 왜 그랬을까, 정말 잘못했다, 그래도 우리 노력했어, 그치, 그래.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이별은 원래 아름다울 수 없는 걸까. 그가 말했다. 나, 다시 만나고 싶은데. 전화 받기 전부터 예상한 말이었지만 한 시간이나 하지 않길래 안 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안 할 수 있었던 말을 하는 수밖에.

미안, 나 궁금한 사람이 생겼어.

비문(非文)이어서일까. 그는 한동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말이 없었다. 나는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내가 궁금한 사람이 생겼다고.

그러고도 한참을 있다가 그는 겨우 물었다. 회사 사람이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응, 하고 짧게 답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숨이 와 닿은 듯 내 볼이 뜨거웠다. 어서 전화를 끊고 자고 싶었다. 파주는 멀다. ‘세전 백오십’을 벌기 위해 나는 일찍 자야만 한다.

괜찮은 거지? 이제 그만 끊자. 잘 지내고.

라고 하려 했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끊자, 씨발.

내가 지금 뭘 들은 걸까. 상황 파악이 잘 안 돼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통화 시간 1:28:44. 현재 시간 11:59. 너는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니. 우리는 고작 이렇게 끝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한 거니. 우리는 고작. 그래, 우리는 고작.

그 정도만 했어도 덜 나빴을 텐데. 최악은 모면했을 텐데. 잠시 후 문자가 왔다.

넌 원래 그래, 이 씨발 창녀야. 그 궁금하다는 새끼랑 뒹굴다 뒤져 버려. 궁금한 건 어차피 언젠가 변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잘 살아라.

그 다음 날 난 전화번호를 바꿨다.

출판사에서 일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나는 회사를 옮겼다. 월급이 올랐다고는 하는데 체감할 수가 없었다. ‘세전 백오십’에서 ‘세후 백오십’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새로 들어간 곳은 신문사였다. 주간신문이었는데 타깃 독자층은 중년 남성들이었다. 주로 정치권 비화나 자극적인 사건사고 기사를 다뤘다. ‘대통령 안가에선 매일 밤 무슨 일이?’에서부터 ‘충격! 20대 여대생의 성생활’까지 기사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황색언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시선이 대다수지만 이따금 정치권을 겨냥한 특종도 터진다, 고 선배들은 3김 정치 시절을 그리워했다.

일은 재밌었다. 중년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분명 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상한 척하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보다는 솔직해서 좋았다. 이 남성들의 세계에서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면, 학자랍시고 추잡한 짓을 일삼는 것들이 아니라 돈 없고 힘없어서 2천 원짜리 신문이나 보며 자위하는 것들이랑 사는 편을 택하겠다. 그것들이 덜 해로우니까.

그런데 이 인간은 왜 자꾸 나타나는 걸까.

일과처럼 출근하자마자 회사 메일을 열었는데 ‘S에게’라는 제목의 메일이 와 있었다. 보낸 이의 계정은 ‘krrrkrrr’. 누구지? 그때까지도 난 메일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 밑에 달린 바이라인을 보고 연락했다, 고 K는 편지를 시작했다. 흔한 이름이라 혹시나 했지만 메일 계정을 보고 확신했다, 로 이어지는 메일은 제법 장문이었다. 나는 가볍게 후회했다. 역시 회사 계정을 ‘manolin’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기사 실명제가 잘못된 거야. 당장 없애 버려야 해. 나는 또 자책하며 메일을 읽었다.

S에게
기사 밑에 달린 바이라인을 보고 연락했다. 흔한 이름이라 혹시나 했지만 메일 계정을 보고 확신했다. 마놀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소년 이름이잖아.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새로 옮긴 회사는 어떤지. 나는 잘 못 지내. 그날 이후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어.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거의 매일 술을 마셨어. 어느 날 변기를 보니 빨갛더라.
왜 난 더 망가지지 않은 거지. 니가 없는데 어떻게 난 아직도 이 정도나 정상인 거지. 그래도 이따금 배가 고픈 거 보고 숨이 쉬어지는 거 보고 자책하며 점점 더 망가지려 애썼던 거 같아.
그러다 너무 괴로워서, 이렇게 살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너한테 전화를 걸었어. 다시 한번만 믿어 달라고, 나도 나를 다시 믿어보겠다고 말하려고.
그런데 궁금한 사람이 생겼다니.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내 욕에 내 감정이 북받쳤나 봐. 안 돼, 안 돼, 그 아이한테 그러면 안 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 이렇게까지 하면 나 스스로 혐오스러워서라도 다신 연락할 용기가 안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이건 실제로 어느 정도 작용하기는 했어).
그래서 그런 문자를 보냈어. 나 쓰레기 같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 문자를. 진심은 절대 아니었지만, 결코 용서하지 마. 나도 절대 잊지 않을게.
그렇게 집에 들어가서 뭔가 쑥 빠져나간 채 덩그러니 누웠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내리 40시간을 누워만 있었어.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는데 나올 게 있었는지 서너 번 화장실은 갔지.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다녀올 때 문득 싱크대 위에 있는 칼이 보였어. 한번 가만히 쥐어 보았는데 따뜻하더라. 이렇게 독려하는 것 같았어.
찔러, 찔러.
무심하게, 태연하게, 천천히 칼을 내 목으로 옮겼어. 남의 일처럼. 칼끝이 목에 닿았을 때, 차갑더라. 그제야 이게 내 일인 걸 깨달았어. 결국 난 나를 죽이지 못했지.
혹시 「처용가」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배웠을 거야. 『삼국유사』에 실린 8구체 향가라고. 역신과 아내가 사통하자 처용이 춤을 추며 부른 노래라고 하지. 역신은 처용의 대덕에 감복해 사죄하고 물러갔다는군.
학교에서 그걸 배울 때 애들이 격분했던 게 떠올라. 남학교라 애들 표현이 거침없었지. 부정한 아내를 어떻게 가만히 두냐, 아주 찢어 죽여야 한다, 뭐 이런 식.
그때 내가 그 미쳐 날뛰는 원숭이 무리에 동조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은 그 생각에 단호히 반대해. 처용은 무당이었다느니 지방 호족이었다느니 하는 교과서적 해석은 일단 차치하고,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처용은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 ‘어쩔 수 없음’은 대덕(大德)도 아니고 무력(無力)도 아니지. 그냥 어쩔 수 없음.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음.
나는 지금 그 처용의 마음을 절실히 이해해. 한번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다. 연락 기다릴게.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용이라니, 자기가 처용이라니. 그럼 처용의 아내는 나란 말인가. 우리가 부부처럼 그렇게 긴밀한 사이였나. 그래, 그건 일단 그렇다고 치자. 역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내가 언제 누구랑 사통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멍한 상태로 나는 어느새 답장을 쓰고 있었다.

K에게
잘 못 지낸다니 유감이긴 하다만 나는 궁금하지 않아. 앞으로 연락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만 분명히 하자. 나는 처용의 아내가 아니야. 내 다리 두 개는 내 것이지 한시도 네 것인 적이 없었거든. 남자들은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자기를 떠난 여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 이해할 필요 없어. 그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니까.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니까. 니가 말하는 ‘어쩔 수 없음’이 너뿐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한다는 걸 명심해. 다시 부탁 좀 하자. 이제 연락하지 마.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그 뒤로 K는 연락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앞으로도 부디 그러하기를, 하고 나는 F의 아파트에 누워 생각했다.

물론, K는 나다.

그리고, S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