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는점

고형주 edited by 김윤우·지다율

#1. INT / 낡은 술집 (밤)

어두운 화면에 탁 하고 가게 문 닫히는 소리로 시작한다.
추운 겨울. 창밖에는 올해 겨울 최고치에 다다른 눈이 내린다. 그래서인지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두운 골목 어딘가에 자리 잡은 술집. 술집치고 너무 조용하다. 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덥수룩한 수염을 한 공석(20대)과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정장 차림의 공찬(20대)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공찬 (공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꼴이 그게 뭔데?

공석은 공찬의 질문에 대답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만 바라본다.

공찬 (대답 없는 공석이 답답해 한숨을 쉬며) 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너 말 잘하잖아. (소주를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야. 말해 보라고. 5년 동안 말없이 떠났으면 돌아와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넌 미안하지도 않냐? 부모님한테…, 나한테?

공석은 여전히 대답 없이 반 잔가량 남은 자신의 술잔만 멍하니 바라본다.

#2. EXT / 학교 운동장 (낮)

5년 전. 고등학생 공찬. 벤치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본다. 운동장에서는 축구부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공찬은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본다.

#3. EXT / 축구 경기장 – 회상 (낮)

경기 중. 공찬이 드리블하려던 찰나에 뒤에서 상대편의 거친 태클이 들어온다. 무릎이 꺾인 공찬은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만다. 심판은 태클한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주지만 그 선수는 오히려 공찬의 할리우드액션이라며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한다. 고통을 호소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공찬의 주위에 팀원들이 하나둘 달려온다. 공찬은 팀원들의 괜찮냐는 물음에 그저 비명만 지를 뿐이다.

#4. INT / 교실 (오후)

교실 안이 소란스럽다. 각자 무리 지어 떠드는 모습. 하지만 공찬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 있다. 그때 종례를 하기 위해 선생님(50대)이 교실로 들어온다. 한 손에는 얼마 전에 봤던 모의고사 성적표가 쥐어져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늘 그렇듯 몽둥이를 돌리고 있다. 선생님의 등장에 소란스럽던 아이들은 자기 자리로 빠르게 돌아간다.

선생님 (몽둥이로 탁자를 치며) 좋은 일 있냐? 뭐가 좋다고 들떠서 난리야? 진짜 정신 못 차리지? (모의고사 성적표를 흔들며) 다들 재수까지 생각하냐?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다. 침울한 아이, 선생님의 말을 거슬려 하는 아이, 듣지도 않는 아이 등등.

선생님 (성적표를 하나씩 나누어 주며) 이름 부르면 나와서 받아 가. 김경철, 김영호, 라홍민, 오종현, 유선모, 정태훈….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앞으로 나가 성적표를 받아오는 아이들. 성적표를 건네는 선생님의 얼굴은 개인 성적에 따라 변한다.

선생님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공찬.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공찬. 선생님은 그런 공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성적표를 던지듯 건넨다. 이내 제대로 받지 못한 성적표는 바닥에 떨어진다.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감추며 성적표를 줍는 공찬을, 선생님은 그제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눈길을 준다. 성적표를 받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소리 없이 주변에 앉은 친구들과 성적을 비교한다. 마지막 아이까지 성적표를 나눠준 후에야 선생님은 아이들을 다시 집중시킨다.

선생님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 새끼들아. 뭐 좋은 성적 받았다고 비교하고 앉았냐? 저녁 먹고 바로 교실로 들어와서 공부해라. 운동장에서 보이는 새끼, 야자 도망가는 새끼. 걸리면 빠따 각오하고.

아이들 네.

#5. EXT / 교정 (오후)

야자를 빠지고 혼자 집으로 가려는 공찬. 부상당하기 전까지 축구부를 함께했던 같은 학년 동수와 한 학년 후배 세진을 만난다. 동수는 평소에 공찬을 눈엣가시로 여겨왔다.

동수 (건들거리며) 야! 공찬 집에 가냐?

공찬은 동수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말없이 다음 걸음을 이어간다.

동수 (놀리듯이 공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야자를 제껴? 그래서 대학 가겠냐?

세진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동수 (세진의 뒤통수를 툭 치며) 선배님은 무슨. 얘가 아직도 축구부냐? 그냥 형이라고 해, 새끼야. (자신의 말에 흡족하다는 듯이 웃는다)

세진 (생각하지 못했던 동수의 말에 놀라며) 네? 그래도….

동수 (세진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이 시발놈이. 그래도? 누가 니 선배냐?

동수의 말과 행동이 거슬려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출 듯하지만 끝까지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걷는 공찬.

세진 (주눅이 든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이 상황을 만족해하며 웃는 동수, 계속 세진을 괴롭히며 낄낄거린다. 공찬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채자, 동수는 세진을 괴롭히던 자세로 점점 멀어져 가는 공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동수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저 개새끼는 언제 봐도 재수가 없어.

#6. INT / 현관+거실 (오후)

집에 돌아온 공찬. 대충 신발을 벗은 채 거실에 있는 엄마(50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다. 엄마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흥얼거린다.

공찬 (엄마를 향해) 다녀왔습니다.

엄마 (놀라며) 너 야자는?

공찬 (엄마를 등지고 자기 방으로 가며) 그냥 왔어요.

#7. INT / 공찬의 방 (낮)

공찬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방에는 축구에 관한 것들뿐이다. 벽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들의 포스터와 그동안 대회에서 받았던 트로피, 초등학교, 중학교 선수 시절 찍었던 사진 등으로 가득하다.

엄마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찬아. 무슨 일 있니?

공찬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아니.

엄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얼굴이 안 좋은데….

공찬 (눈을 감아버리며) 아니야. 별일 없어.

엄마 그래. 그럼 조금 쉬었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자.

공찬 저녁 생각 없는데.

엄마 (다소 들뜬 목소리로) 형 취업했대. 축하해 줘야지. 쉬다가 7시에 나가자.

공찬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알았어.

엄마 (방문을 나가려다 갑자기 생각난 듯) 아, 참. 그리고 형한테 축하한다고 메시지라도 보내줘.

공찬 응.

엄마는 방문을 닫고 나간다. 공찬은 돌아누웠던 몸을 다시 돌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잠시 후, 공찬은 슬며시 핸드폰을 집어 든다.
‘형. 축하해’ 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공찬의 손과 핸드폰 화면 (E.C.U)

#8. INT / 아빠의 차 안 (밤)

아빠(50대)와 엄마 그리고 공찬 셋이 차에 있다. 운전하는 아빠와 조수석에 탄 엄마는 들뜬 모습이다. 뒷좌석에 앉은 공찬,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9. ENT / 공석의 대학교 앞 (밤)

공석은 학교 앞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며 아빠와 통화를 하고 있다.

공석 저 지금 교문 앞에 있는데 다 오셨어요?

아빠 여기 교문 앞 다 왔는데.

공석 (두리번거리며 아빠의 차를 찾는다) 안 보이는데…. 아! 저기 있다. 제가 갈게요. 끊어요. (전화를 끊고 차로 가볍게 뛰어간다)

#10. INT / 아빠 차 안 (밤)

공석이 차에 탄다.

공석 에이, 뭐 학교까지 데리러 와요. 그냥 중간에서 만나면 되지.

엄마 (들뜬 목소리로) 네 아빠가 오늘은 장남 모시러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

아빠 오늘은 그래도 특별한 날이지 않니.

공석 (부모님을 향해 가볍게 웃은 뒤 공찬을 향한다) 공찬! 야자 안 했어?

공찬 응.

공석 (웃으며) 오늘은 형이 기분 좋아서 봐준다.

공찬 응.

#11. EXT-INT / 주차장+레스토랑 (밤)

레스토랑에 도착한 가족. 차에서 내린다. 평소라면 오지 않을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라 다들 기분이 좋다. 묵묵히 가족의 뒤만 쫓는 공찬만 빼고.

종업원 (정중하게 인사하며)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나요?

아빠 네. 여덟 시 네 명 예약했습니다.

종업원 (들고 있던 예약리스트를 체크하며) 여덟 시에 네 분 예약이요. 성함이 공석 님 맞으신가요?

아빠 네. 맞습니다.

종업원 예약 확인되셨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안내에 가족들은 레스토랑 안쪽으로 이동한다. 레스토랑 벽에는 미술관을 연상케 할 만큼 여러 그림이 걸려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설경」이다. 그림들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종업원은 멈춘다. 창밖은 도시의 화려한 불빛들로 가득하다.

공석 (창가에 다가서며) 우와. 전망이 진짜 좋네요.

엄마 아빠가 장남 취직했다고 얼른 예약하시더라.

공석 (아빠를 바라보며) 감사해요.

아빠 오늘 같은 날엔 이런 데도 와야지. 어서 앉자.

가족은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네받는다. 메뉴를 보다 어려움을 느꼈는지 종업원에게 메뉴를 추천받는다. 주문을 마치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후 주문한 스테이크와 와인이 나온다. 종업원은 자신이 가져온 와인을 소개하며 와인 테이스팅을 아빠에게 권한다. 하지만 아빠는 공석에게 돌린다. 공석은 잔을 두세 번 정도 돌린 후 마신다. 입에 잠시 머금고 음미하며 만족해한다.

공석 맛있네요.

종업원 (아빠, 엄마, 공석에게 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고 가볍게 인사하며)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아빠는 잔을 들고 건배 제의를 한다. 공찬은 물을 든다.

아빠 석이가 고맙게도 졸업 전에 취직해서 너무 기쁘다. 항상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할 거라고 믿는다. 축하한다.

공석 고맙습니다.

아빠의 축하에 이어 엄마, 공찬도 축하해준다.

공석 다들 정말 감사해요. 운 좋게 졸업 전에 취업했네요. 비록 메이저 언론사는 아니지만 여기서 잘 준비해서 더 좋은 곳으로 갈게요.

아빠 운이라니. 우리 장남이 성실하게 잘 준비했으니 순탄하게 취업한 거지. 정말 자랑스럽다.

화기애애하게 식사한다. 엄마는 갑자기 생각난 듯 공찬을 바라본다.

엄마 아, 참! 찬이 모의고사 성적표 나오지 않았니?

아빠 그래? 성적 좀 올랐어?

엄마, 아빠의 연속되는 질문에도 공찬은 대답 없이 식사만 한다. 기다리던 답이 없자 엄마는 공찬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연다.

엄마 (측은한 듯) 과외라도 할래?

공찬 (식사하던 것을 멈춘다) 아니요.

아빠 기술이라도 배울래? 자격증 공부라도 하든가. 전문대라도 가야지.

공찬 대학… 생각 없어요.

아빠 (공찬과의 대화에 답답해 다소 흥분한다) 대학 안 가면 뭐 할 건데?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공찬 잘 모르겠어요.

공석 (어색해진 분위기에 중재에 나선다) 에이~. 기분 좋게 왔는데 즐겁게 식사해요. 찬이도 다 생각이 있겠죠. 얼른 식사하세요.

공석의 말에 아빠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 모습에 엄마는 눈치를 볼 뿐이다.

#12. INT / 집 (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 외출할 때에 비해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 공석은 힐끔힐끔 가족들의 얼굴을 살핀 후 입을 연다.

공석 우와~. 배부르다. 그 집 분위기도 좋고 맛도 있네요. 다음에 또 가요.

엄마 그래, 다음에 또 가자.

공석 다음에는 제가 월급 받아서 쏠게요.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고 먼저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공석도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13. INT / 공찬의 방 (밤)

공찬은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 한다. 그 순간 방문을 노크하고 공석이 들어온다.

공석 (과일을 들고 오며) 찬아, 뭐 해?

공찬 (귀에 꽂으려던 이어폰을 내려놓는다) 그냥 있어.

공석 (공찬의 옆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건네며) 저녁 맛있었지?

공찬 (과일을 받아들며) 응.

공석 아까 문자 고마워.

공찬 (공석의 고마움의 표현을 어색해하며) 응.

공석 괜찮아?

공석의 질문에 공찬은 답이 없다.

공석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것만 찾았으면 좋겠어.

공찬 (공석의 말에 고마움을 느낀다) 응. 근데 너무 어려워.

공석 그럼 당연히 어렵지. 그래도 차근차근 생각해 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어려운 거잖아. 너는 나랑 다르게 잘 하는 것도 많잖아. 기타도 잘 치고, 피아노도 잘 치고, 운동도 잘하고, 손재주도 많고….

공찬 (공석의 얼굴을 보며) 고마워, 형.

공석 (조금 밝아진 공찬의 얼굴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고맙긴.

공찬 형은 언제부터 출근이야?

공석 다음 달 1일부터. 벌써부터 긴장되네.

공찬 (의외라 생각하며) 형도 긴장을 해?

공석 긴장되지. 설레고, 기쁘고. 그냥 TV에서 보고 막연하게 꿈꾸던 기자였는데 막상 됐다고 생각하니 실감도 안 나고.

공찬 형은 잘 할 거야. 늘 그랬잖아.

공석과 공찬의 담소가 이어진다. 잠시 후, 공석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고 나온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공석의 모습 M.S.

#14. INT / 공석의 방+현관 (낮)

공석의 첫 출근 날. 거울 앞에서 옷을 정돈한다. 넥타이를 몇 번이고 고쳐 맨 후에야 만족한 듯한 얼굴로 방을 나선다. 부모님께 간단히 인사하고 나가려는 공석을 현관까지 배웅하는 아빠와 엄마.

엄마 (공석의 어깨에 묻어 있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 주며) 떨지 말고. 잘 하고 와.

아빠 (엄마를 나무라며) 어련히 알아서 잘 할라고.

공석 그래요. 잘 하고 올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아빠 그래. 잘 하고 와라.

공석 네.

#15. EXT / 지하철역 (낮)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공석은 뒤로 메고 있던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멘다. 그리고 오늘 자 신문을 꺼내 들고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A4용지 크기로 접어서 읽는다. 기사 하나를 읽고 다음 기사를 읽을 때쯤에 지하철이 들어온다. 멈춰 선 지하철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공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첫 출근에 지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공석은 억지로 자신의 몸을 끼워 넣는다. 지하철에 한 명씩 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16. INT / 지하철 안 (낮)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들. 손에 든 신문을 읽지도, 가방에 다시 넣지도 못하는 공석. 잠시 후, 공석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 공석은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서 잠수한 후 참았던 숨을 내몰아 쉬듯 숨을 내뱉으며 떠밀려 지하철에서 내린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안도의 얼굴로 옷을 정돈한 후 회사로 향한다.

#17. INT / 공석의 회사 (낮)

공석은 동기 3명과 함께 선배 1의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사무실로 들어온다. 공석을 포함한 신입들은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메모를 하는 동기도 있다. 사무실의 타자 소리가 요란하다. 신입들은 그런 광경을 마냥 신기하게 쳐다본다. 선배의 설명은 계속된다. 그때 다른 선배 2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하고 전체적인 모양새가 꾀죄죄하다.

선배 2 (뒷머리를 긁적이며 신입들을 훑어본다) 얘네가 오늘 온다는 신입이야?

선배 1 네. (선배를 살피며) 선배, 어제도 밤새웠습니까?

선배 2 (하품하며) 응. 어제는 경찰서에서. (여자 신입을 빤히 보다 고개를 돌리며) 웬만하면 얼굴 좀 보고 뽑지.

선배의 말에 신입들은 당황한다. 선배 2가 지나가고 선배 1은 각자의 자리를 차례차례 알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석의 자리도. 공석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으려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일어나 힘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공석 안녕하십니까. 공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석의 인사는 타자 소리에 묻히고 공석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 앉는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있던 공석은 오늘의 뉴스를 본다. 그때 조용히 뒤에서 선배 3이 다가온다.

선배 3 이 새끼 봐라. 편해 보이네.

놀란 공석은 벌떡 일어나 선배 3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공석 안녕하십니까. 신입기자 공석입니다.

선배 3 (비아냥거리며) 기사를 써야 기자지. 너 기사 썼어?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선배를 바라보는 공석.

선배 3 (짜증을 내며) 공석? 야, 첫날부터 네 자리 공석으로 만들어 줄까?

공석 죄송합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부장이 둘을 발견한다.

부장 (선배 3을 나무라며) 너는 또 신입 괴롭히냐?

선배 3 아니, 괴롭히는 게 아니라요.

부장 그럼 뭔데? 아, 됐고. 네가 신입 좀 맡아서 가르쳐.

선배 3 (짜증을 내며) 부장. 저 할 일도 많은데….

부장은 선배 3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얼떨결에 공석을 맡게 된 선배 3은 아까보다 더 짜증이 섞인 얼굴이고, 공석은 그런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치만 본다.

선배 3 (공석을 향해) 야! 너 각오해라.

#18. INT / 회사 근처 껍데기 집 (밤)

동기끼리 화합을 다지자는 의미에서 동기 회식을 하는 공석. 식당에는 직장인들로 가득하다. 공석과 동기들은 껍데기와 소주를 마신다. 이야기하며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갔을 때 붉어진 얼굴로 동기 1이 화를 낸다.

동기 1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요란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할수록 열 받네. 아까 나한테 한 말 들었어요? 뭐? ‘웬만하면 얼굴 좀 보고 뽑지’?

동기 2 그래. 그거 진짜 어이가 없더라고요.

공석 그니까요. 저는 아까 옆에 선배가 가만히 있는 것도….

동기들의 공감을 얻어서인지 더욱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쉬는 동기 1.

동기 3 (동기 1을 다독이며) 진정해요. 우리는 절대 그런 선배 되지 말고 좋은 기자가 되자고요. 자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 한 번 해요.

동기 2 (동기 1에게 술을 따라주며) 그래요. 기분 풀고. 우리 다음 주부터 하리꼬미 도는데 화이팅 해요!

애써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하는 동기 1. 공석과 동기들은 건배로 의기투합한다.

#19. INT / 경찰서 숙직실 (새벽)

숙직실 안은 여러 타사 기자들로 가득하다. 다리를 쫙 펴지도 못하고 자는 사람, 앉아서 자는 사람이 태반이다. 공석도 다를 바 없다. 한 달째 제대로 잠도 못 자며 하리꼬미를 도느라 공석의 모습은 엉망이 된 지 오래다. 편히 눕지도 못한 채 졸린 얼굴로 수첩에 낙서만 할 뿐이다. 수첩은 ‘기사’, ‘기자’, ‘취재’, ‘사건’, ‘사고’ 등 여러 메모로 채워져 있다. 무의식적으로 ‘사고’라는 단어에 펜이 갈 때쯤 공석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공석 (한숨을 쉬며) 이러다 선배한테 또 까이겠네. 어디 사고라도 안 나나.

그때, 공석에게 전화가 온다. 공석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는다.

공석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응.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공찬 형. 통화 괜찮아?

공석 응. 무슨 일인데?

공찬 (망설이는 듯하며) 아니, 엄마는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아까 엄마, 아빠가 접촉사고 났었거든. 많이 다치신 건 아니야.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했고. 그냥 형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공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얼굴의 공석.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통화가 끝난다. 잠시 후, 선배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얼굴로 전화를 받는 공석.

공석 네. 선배.

선배 3 (전화 목소리) (화가 난 목소리로) 야! 너는 보고 안 하냐?

공석 아직… 보고할 게….

선배 3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쉰 뒤 정색하며) 하, 참. 이 병신 같은 새끼가 장난하나.

선배의 폭언에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는 공석. 선배의 폭언은 계속된다.

선배 3 (진정하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너 지금 당장 믿음 장례식장으로 가. 거기 사건 하나 터졌다니깐, 가서 상세히 보고해.

공석 네.

공석의 대답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진다. 공석은 끊어진 전화를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귀에 대고 있다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만 챙겨 숙직실을 나선다.

#20. EXT-INT / 믿음 장례식장 (새벽)

헐레벌떡 택시에서 내리는 공석. 내리자마자 주머니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며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장례식장 안에는 고인의 부인이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이미 와 있던 타사 기자 두 명이 경쟁하듯 부인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다. 공석은 그 모습에 잠시 멍해진 표정으로 주춤거린다. 그리고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수첩을 펼친다. 딸깍딸깍. 볼펜 심이 나오지 않는다. 딸깍딸깍. 좀 전까지 잘 썼던 펜이, 부인에게 다다를 때까지, 소리만 난다. 딸깍. 공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힘없이 양손을 툭 떨어뜨린다. 카메라는 공석의 더러워진 구두를 잡고, 천천히 틸트 업해서 잉크가 여기저기 묻은 공석의 손을 비춘다. 다시 구두로 틸트 다운 하면, 공석이 걸음의 방향을 바꾼다.

#21. INT / 병원 탈의실 (밤)

일과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공찬. 다른 동료들도 탈의실로 들어온다.

동료 1 (공찬의 옆에 서서) 공찬 쌤. 수고했어요. 오늘도 환자 많았죠?

공찬 늘 똑같죠, 뭐.

동료 1 공찬 쌤만 너무 열심이야. 힘들면 다른 쌤들한테 환자 넘겨요.

공찬 아니에요. 어르신들 재활치료 해 드리면서 저도 많이 배우는걸요.

동료 1 (공찬의 어깨를 툭 치며) 쉬엄쉬엄해요. 그러다가 병나겠어.

공찬 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동료 1 그래요. 내일 봐요.

#22. INT / 버스 정류장+버스 (밤)

이어폰을 꽂고 버스를 기다리는 공찬.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고 공찬은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 정거장씩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공찬은 겨우 자리에 앉는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23. INT / 집 (밤)

구두를 벗고 들어오는 공찬. 거실에 있는 부모님께 인사를 한다.

공찬 다녀왔습니다.

아빠 (뉴스를 보다가 공찬의 인사에 공찬을 바라보며) 그래. 퇴근이 늦었구나.

공찬 네. 요즘 일이 좀 많아서요.

엄마 (소파에서 일어나며) 저녁은 먹었어?

공찬 아니요. 아직이요.

엄마 (주방으로 가며) 씻고 와. 금방 밥 차려줄게.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공찬은 식탁에 앉는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한 숟가락 뜨려 한다.

엄마 (국을 뜨며) 네 형은 아직 연락 없니?

공찬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네.

엄마 너 정말 형 어디 있는지 몰라?

공찬 (화를 내며) 정말 모른다고요.

아빠는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24. EXT / 눈밭 (낮)

어두운 화면에 드르륵 하고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이 보인다. 작은 발자국이 하나하나 찍힌다. 그 뒤로 더 작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뒤따른다.

어린 공찬 (천진난만한 목소리) 형아, 같이 가.

어린 공석 (해맑은 목소리) 천천히 와. 넘어지지 말고.

두 개의 발자국은 아까보다 더 커져 있다. 두 개의 발자국은 서로 말이 없고 눈 위를 밟는 소리만 가득하다. ‘뽀드득뽀드득’. 발자국은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갈라진 두 길이 명확해질 때쯤, 카메라는 다시 천천히 원래의 작은 발자국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서서히 클로즈업한다. 멀리서 볼 때 몰랐던 두 발자국의 시작점이 처음부터 달랐다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