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들 외 4편

윤창조 edited by 지다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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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들

바다보다 좋은 바다
해가 지도록 나란히 앉아
파도소리를 대답들의 뿌리로 심었지

어려운 시절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목소리를 틔우지 않았다

하루는 하루씩 지나갔다

석양 끝에 걸린 침묵을 따라
하루의 윤곽이 무디어지고,
무거워지고,

작은 고깃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바다가 너무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오랜 행복으로 고단한 동화들을
보살피는 밤이 오면

저녁산책

꽃잎을 만난 바람
마음이 걸려 머뭇거리네

돌아갈 마음 없이
더 갈 곳도 없어
서성이는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멀어짐으로

네가 아닌 모든 것들

천천히,
천천히 더 빠르게

마른 가지 끝에
달이 긁힌다.

어딘가에 넘어진 화분이 있는,
네가 없이 길어진 길

고민

밤은 잃어야 셀 수 있다
이음새들 끝에서마다 부재가
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다른 끝으로
밤을 넘겨 가면서
오래 부푼 바람이 닳는 일들에
드나드는 길에 쌓아둔 한숨들이 흩어지거나
식으면
잃지 않아도 사라지고

들판에서처럼 때마다 서성이는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 오두막 주변에서 마음이었다가
가장자리로 낡은 버팀목들을 세어본다

밤사이 아침이 되고
아침마다 햇살이 호수로 들어간다
꿈결로 물결을 쥐고 있는
하늘을 덮고 있는 수심으로
내 숨들은
늦게까지 오두막 문을 찾던 내 촛불을 끄고
다시 낀 오랜 잎사귀들 틈으로
아직 다 잃지 못한 것들을 두고

발을 헛디디셨다지

불쌍한 손자 온다고
낮부터 뜨겁게 달궈진 방 안에서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게 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가요무대를 좋아했다.
늘 처음 두세 곡이 지나기도 전에 잠들었다.
오래전 가수들이
이제는 많이들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이제는 많이들 부르지 않는 노래들을
오늘 일처럼 부르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안심이 되어
그들을 무대에 두고 잠들 수 있었다.

할머니의 약봉지들과
과일쟁반, 단감과 삶은 밤, 과일칼,
벽에 걸린 달마,
낱장씩 뜯는 달력,
텔레비전의 작은 소리
모두 지나간 시절이 더 좋았다고
그때가 그렇게 지나가
다시는 그렇게 좋지 못할 거라고
들어본 노랫말들을 함께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웃으면서 부르는 슬픈 노래를,
답답한 공기와 너무 큰 시계를,
오랜 냄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할머니도 자기처럼
불을 켜놓은 채로 잠드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주
자기가 엄마한테 듣는 말들을
할머니도 들을 때면 더 좋았다.

마지막 가수의 무대가 화려한 눈물로 끝나면 아이도
남은 소리를 천천히 한 단계씩 다 줄이고
그리고 텔레비전을 조심스럽게 끄고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게 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엄마가 와서 같이 밥을 먹고
할머니가 감을 깎아주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는
신문이 있을 탁자나 전화기 근처에 먼저 가보기를 좋아했다.
아빠가 어느 직업을 찾고 있었는지
구인란에 그어진 줄들을 쫓아보기를 좋아했다.
직업 설명마다 다른 아빠를 상상해보기를 좋아했다.

오래지 않아 아이는 신문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후에 조금 더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늦은 밤까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여전히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사람을 못 알아보기 시작하면
이제 더 고생하느니 서로 나은 일이라고
식구들이 이제는 더 나아질 거라는
어른들의 작은 말들과
웃으면서 닦는 그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는 벽에 달마가 없는 것은 좋았지만
모르는 사람들 말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얼굴 아는 가수들을 부를 수는 없을까 바랐다.
그러나 그때쯤 아이는
그 마음이 가난한 어른들을 아프게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라도 끄고 싶었다.

큰길 건너편까지 잠시 몰래 나갔다가 들어왔다

여행이 길어지면 2

가볼수록 갈 길만 남는 내일은
조금 더 미지의 풍요인지
우리를 가두는 처지인지,

무엇을 더 슬퍼해야 하는지

반쯤은 허물어진 신발처럼
가방 안으로 가라앉은 편지처럼
어깨가 아픈 방에 누워
마음보다 먼저 잠드는 말들

뒤따라 피는
파도의 마른 잎들,
목소리의 얼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