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우희 edited by 정윤

1.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요일 오후,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책상에 교정지가 놓여 있었다. 불금을 기대하며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월요일까지 해 줄 수 있죠?”

“그럼 저는 주말에 나와서 일해야 하는 건가요?” 하고 되물었어야 했다. 대신 “네…” 대답하고 나서 엄한 곳에 화풀이를 했다. 디자이너는 편집자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인형일까. 편집자는 편의대로 마감날짜를 당기거나 늦추기도 하면서 왜 디자이너는 매번 ‘을’이어야만 하는 걸까. 책은 같이 만드는 건데!

만약 누군가 ‘왜 다른 일이 아닌 그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북디자인을 하고 싶은 이유는 ‘한 권의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 책 속의 이야기와 책을 만들며 생기는 나의 이야기’가 즐겁기 때문,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분명 출판사에 제출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면접을 볼 때는 그랬다. 책을 둘러싼 이야기, 책을 짓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나는 재미있게 책을 만들고 있을까. 예상했지만 먹고 사는 일은 취미와 달라서 한 권 한 권 책을 만들며 즐거울 때보다는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표지 시안을 보여 주기로 한 날. 편집자는 팀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어떤 것이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와 먼저 상의하고 좀 더 정리된 후에 의견을 모아도 늦지 않았을 텐데. 표지품평회가 시작되었고 시안과 함께 내 마음도 난도질당했다. 독자의 눈이라며 이해하려 해도, 다른 직원들에게 시안을 평가 받는 자리는 늘 어렵다.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피드백을 받으면 작업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마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디자이너의 숙명일까. 결국에는 담당편집자와 팀장, 사장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그 사이에서 디자이너만 등이 터졌다는 슬픈 사연도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이 북디자인을 처음 시작하며 막연하게 기대했던 ‘책을 만들면서 생기는 이야기’들이겠지. 내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2. 마감한 책은 당분간 보고 싶지 않네요

영화 감상에 비하면 독서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란 걸 디자이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읽을 땐 눈도 굴려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하니까. 독서를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의 임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점검하는 일이다. 제본이 잘 됐는가? 인쇄는 완벽한가? 더 수정할 부분은 없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가장 최근의 작업이 가장 잘한 작업이 될 수 있도록.

프로파간다 편집부, 『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프로파간다, 2017), 96쪽.

‘노력이 필요한 일’을 감수하며 기꺼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독자들을 위해, 디자이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독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부모님, 친구, 지인이 읽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 책을 지어야 한다. 이것이 갓 걸음마를 뗀 북디자이너의 각오다. 모든 직업인에게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다소 우직하고 미련하기도 한 어느 청년의 직업관이기도 하다.

신간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교정을 보고 텍스트를 수정하느라 작업 중에는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천천히 읽어 보려고 책을 다시 펼쳤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대부분 원고를 먼저 읽고 디자인을 하지만, 이 책은 전임자가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작업한 것이다. 무려 9교에서 마감한 무시무시한 책이었다.] 그런데 내용보다도 저만치 간격이 벌어진 약물(문장부호)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심지어 배경이미지가 빠진 페이지까지 발견하고 나서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북디자인을 하면서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책의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텍스트도 그림처럼 보게 된다는 것. 특히 내가 본문을 디자인하거나 수정한 책은 그 정도가 심해서 펼치기마저 무섭다. 심지어 누가 잘못된 부분을 알려 주는 것도 싫다. 무슨 심보일까.

이미 인쇄가 완료되어 다음 주면 전국의 서점에 배포될 새 책이, 내 손에 들려 1교 교정지처럼 빨간 줄과 동그라미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자들이 부디 눈치채기 않기를 바랄 뿐. 빨간 줄에 마음이 쓰여 초록색 글자로 내 잘못을 덧붙여 보았다. ‘2쇄는 예쁘게 찍자. 빨리 사 주세요. 다 없애 주세요.’ 이런 나를 북디자이너라 할 수 있을까?

3. 내용과 외형 사이의 균형잡기

지난 여름, 한 인문서의 표지를 작업하면서 나 때문에 책이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 원고를 읽었을 때는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무게감을 잃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디자인을 너무 만만하게 여겼다. 함께한 편집자의 배려가 없었다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편집자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었고,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재촉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시안을 거치고서야 책이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저에게 북디자인은 직관과 은유의 결합이에요. 표현이 은유적이어서 대놓고 드러나진 않지만 이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보여주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은유, 『출판하는 마음』(제철소, 2018), 177쪽.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인은 어렵다.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든 또는 직접적이든, 책의 느낌을 잘 표현해 내는 동시에 책 판매량에도 한몫하는 디자인은 더욱 그렇다. 원고를 읽으며 디자인 구상이 직감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책은 조금 더 긴 인고의 시간을 안겨 준다. 여름에 작업했던 그 책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리다.

난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좋으면 외형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북디자인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깊었다. ‘이 일은 정말 꼭 필요한 일인가?’ 책 외형이 중요하지 않다는 발상이 북디자이너가 필요 없다는 위험한 결론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만들 때마다 이 일의 의미를 몸소 느낀다.

‘형태를 갖추지 않는다면 흩어진 종이 낱장일 뿐, 우리가 말하는 책이 아니겠구나, 글을 눈으로 읽기 좋게 다듬질해 주는 일은 북디자이너만 할 수 있겠구나.’

“디자인의 영감은 텍스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이것이 제 일의 가장 복잡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원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어떤 얼굴을 원하는지 그 대답이 있는 곳으로 텍스트가 저를 이끌어 줍니다. 뛰어난 북디자이너는 텍스트 안에 숨겨진 목소리를 디자인이라는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여야 합니다.”

시미즈 레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학산문화사, 2013), 123쪽.

‘가장 훌륭한 디자인은 더 이상 추가될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것’이라는 생떽쥐베리의 말처럼 빼고 더 빼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욕심부리며 가득 채우려고 버둥거리다 보니 알 것도 같다.

4. 책을 공부하는 이유

우리 회사에서는 매주 팀원들이 모여 회의를 한다. 편집자들은 기획안을 공유하고 마케터는 신간 홍보방안을 제안하며 각 팀원의 의견을 듣는다. 그럼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굿즈. 굿즈, 굿즈뿐이었다. 매주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모든 책에 사은품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시간이 갈수록 회의 준비가 부담스러웠다. 편집팀에서 시리즈 론칭을 준비한다고 하여 국내 출간된 여러 시리즈 도서의 표지와 본문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일에 근무시간을 썼다고 핀잔을 들었다. 핸드북 제작을 제안했다. 비용에 비해 효과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어떤 날은 굿즈를 제안했다. 저렴하지만 있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회의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물론 통과된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회의에만 들어가면 애매해져 혼란스러운 디자이너의 역할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SNS 마케팅이나, 구간 개정을 제안하는 등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여러 시도를 하게 되면서부터 차츰 회의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로소 출판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점차 확장되기 시작한 것 같다.

“디자이너가 감각만으로 디자인하는 시대는 곧 끝난다.”선생님이 늘 하던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쉽게 결론 내린 것이 아니리라고 짐작된다. 아마도 반은 소망이었겠지만, 당시 나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 말을 지금까지 버팀목으로 삼았다. 디자이너는 감각으로만 디자인할 게 아니라 ‘왜 그것을 하느냐’는 질문을 품고 언어로서 디자인을 쌓아 가야 하며, 그렇게 할 때에 지속해서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껏 그 이상을 쫒아 꾸준히 디자인을 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요리후지 분페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안그라픽스, 2018), 34쪽.

북디자인에는 감각만으로 작업하기엔 어려운 영역이 있다(적어도 본문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서 책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한다. 대학을 가기 위해, 취업을 위해 억지로 하던 공부였는데, 이젠 더 괜찮은 책을 만들기 위해 공부한다. 본문에 쓸 서체를, 더 잘 읽힐 수 있는 자간을, 눈이 피로하지 않을 행간을, 원고의 특성에 맞는 여백을, 책을 돋보이게 할 컬러를. 더 나아가서는 책의 기획 의도를, 책의 독자를, 책 마케팅을, 책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을 공부한다. 노트에 써 가며 달달 외우는 공부는 아니지만, 관련 자료를 찾고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고 도서관과 대형서점, 동네책방을 드나들며 나만의 방식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책을 만들면서 생각했다. ‘책 만드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구나. 하지만 계속해서 더 나은 책을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렵겠구나.’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힌다.

5. 그래도 계속하기

회사 내부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몇 달간 계속되었다면 회사에서도 뭔가 다른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사실, 지난 마감이 끝난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았다. 팀장님도 당분간 무엇이든 알아서 하라는 눈치고,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회사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기타 행정 업무나 참고자료 리서치 등을 함에도 불구하고 책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움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기다림에 인색한 편이다. 이대로라면 나의 커리어에 구멍이 날 것만 같고, 다음 책이 나오기까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북에디터’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웹사이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정처 없이.

꿈꾸는 일이나 시작하는 일, 그리고 시도하는 일은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은 견디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일을 할 때 견딜 수 있다. 아무 일이나 견디기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견딜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 다시 말해 견딜 수 있는 꿈을 꾸는 것, 그 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수희,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마루비, 2018), 180쪽.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하는 일이 너무 반복적이고 지루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정했다. 견딜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재밌는 일을 시작했는데, 나는 그 잠깐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또 방황하고 있다. 나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견디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마우스를 놓고 사무실 밖을 나와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