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뫼비우스의 띠, 8

문어사 POR edited by 지다율

역시 타코야키를 팔았어야 했나.

뭐 북페어에서 타코야키를 팔 수는 없으니 타코야키 책을 냈어야 했나. 『아무렴, 타코야키』라든지 『당장이라도 죽고 싶지만 타코야키는 먹고 싶어!』 같은. 아니면 가쓰오부시가 흐늘거리는 타코야키 모자나 문어 탈이라도 구해다가 쓸 걸 그랬나. 아니, 그것도 아니지. 역시 타코야키 모양 배지나 인형, 타코야키를 굽는 고양이가 그려진 엽서를 만들었더라면……. ‘제14회 언리미티드 에디션’ 행사가 열리는 북서울시립미술관의 한복판, ‘문어사’라는 글자가 적힌 부스 테이블에 멀뚱히 앉아서 O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북페어가 3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돌아왔고, 오늘은 토요일이고, 통상적으로 행사 첫날보다 두 번째 날 관람객 수가 더 많다는데 책 판매량은 어찌 어제보다도 저조한가. 문제가 있다면 뭔가.

혹시 O의 자리가 특별히 나쁜 건 아닐까? 아니다. 문어사가 배정받은 ‘D-8’ 부스는 오히려 유리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행사장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눈길이 향하는 위치이자 코너이기도 해서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다른 부스로 분산될 확률이 낮다. 다른 부스에 비해 존재감이 유독 약한 걸까? 비교적 덜 알려진 신생 출판사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 이 행사장 안의 문어사 부스는 사람들의 이목을 충분히 끌고 있다. 가벽 덕이다. O와 팀원들은 주최 측에서 부스 홍보 목적으로 마련해 준 임시 가벽에 포스터나 사진을 다닥다닥 붙이는 대신 출판사를 짧게 소개하는 문장과 4마리의 문어 캐릭터를 시트지로 제작해 붙인 뒤 커팅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결과는 제법 만족스럽다. 간결함과 여백이 임팩트가 되었으며 귀여운 문어 캐릭터들은 어디서든 눈에 띈다.

어쩌면 문제는 그 4마리의 문어가 지나치게 귀엽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사람들은 가벽의 문어들을 보고 성큼 다가온다. 그러나 모종의 기대와 호기심이 그득 어린 그 눈들이 테이블을 빠르게 훑을 때, 애석하게도 O의 테이블 위엔 가벽을 유영하는 문어들이 뿜어내는 귀염성을 이어받을 굿즈나 스티커 대신 문어사가 펴낸 3종의 서적과 그 서적으로부터 발췌한 문장이 담긴 엽서 정도가 있을 뿐이고, 그래서 대부분은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떠나거나 동행과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떠나거나 책을 한두 장 들춰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떠난다.

개중 드물게는 질문을 두어 번 던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때 O가 받는 질문들이란 보통 책 내용이나 저자와는 별 상관이 없고 대충 이렇다. 왜 팀 이름이 문어사예요? 누가 저 문어들을 그렸나요? 문어의 ‘문’이 정말 ‘글월 문’인가요? 책이 왜 이렇게 비싼가요?(…….) 방금 막 떠난 이는 가벽에 쓰인 출판사 소개 글과 테이블에 놓인 책들을 번갈아 가며 골똘히 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키친테이블라이팅을 소개합니다’라고 돼 있는데 요리책은 없네요? 아, 그게, 키친테이블라이팅이란 건 요리책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하루를 마치고 주방 탁자에서 쓰는 이런저런 기록물을 가리키는데 어쩌고저쩌고. 키친테이블라이팅과 요리 사이에 어떤 관계성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떠났지만, O는 그래도 책에 관해 물어 온 그가 고맙다고 여기며 그의 오해가 일견 타당하다고도 느낀다. ‘키친’테이블라이팅을 소개하는 ‘문어’라면서 ‘요리’를 다루지 않는다니. 황당할 수 있지.

같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같은 말을 55차례쯤 반복하자니 O는 여러모로 쇠약해져서, 잠시 미술관을 벗어나기로 한다. 미술관 앞마당에서는 지자체가 주관한 축제가 한창이고 늦가을의 주말 풍경은 단란하다. 숨을 크게 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O는 축제, 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굴린다. 그도 ‘책들의 축제’ 한가운데에 있건만 단란해지기가 여간 쉽지 않다. 현재 상태는 단란보다는 심란. 곧 건물 안으로 들어온 O는 행사장을 크게 돌며 사람이 몰리는 부스들을 슬쩍슬쩍 염탐해 본다. 요새는 책뿐 아니라 굿즈도, 심지어 창작물을 소개하는 창작자들의 언변도 화려강산이다. 따듯한 그림체의 일러스트레이션북과 공을 단단히 들인 팝업북, 홀로그램 후가공을 감행한 잡지, 판화 기법을 적용한 아코디언북, 명화 속 상징적 소재를 구현한 배지들, 에코백, 패브릭 북 커버, 나무의 미네랄을 추출해 만들었다는 텀블러, 도무지 판매에 실패할 가능성이 없을 강아지와 고양이 포스터와 스티커 세트를 지나 돌아온 O의 테이블은……. 아무래도 너무 간결한가. 책만으로는 부족한가.

물론 문어사 부스에도 수많은 ‘잠재 독자님’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O는 잠재 독자님의 시선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눈으로 기민하게 좇아가며 소개말을 한다. 보고 계신 책은 지난주에 찍은 따끈한 책이고요, 중쇄 기념으로 표지 디자인을 싹 새로 하고 내용도 추가했어요. 아, 옆의 그건 내년에 나올 신간의 티저북인데요, 뭐랄까, 미리 보기라고 생각하시면 되ㄴ……. 아, 지금 집어 드신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출판사 베스트셀러(펴낸 서적이 3권뿐이긴 하지만)로, 작가가 일본에서 4년간 지내며 쓴 일기를 엮……. 그러나 잠재 독자님은 O의 절절한 말을 더 듣지 못하고 “감사해요”라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옆 부스로 흘러간다.

(과장을 약간 더해) 자식 같은 책들이 잠재 독자님과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은 O를 퍽 괴롭게 한다. 잠재. 잠재워진 감사. 잠재워진 의욕. O는 주저앉듯 의자에 앉아 지금이라도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 밀린 잠을 보충하는 편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이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축제는 끝났다. 돈도 안 되고 보람도 안 되고 위로도 안 되는 이따위 책 만들기와는 정말이지 당장 헤어질 결심을 해야 마땅하다. 사실 책을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무한히 반복해 온 결심이건만 또 어리석게도 무한히 보류해 왔다. 좌우지간 이번에야말로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 낼 것이다. 마침내.

어, 저 여기 책 다 사서 읽었는데. 그때 정수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O의 분노를 깡그리 잠재운다. 고개를 든 O 앞에 책장을 소중히 살펴보는 이가 있다.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한마디를 보탠다.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지 궁금했어요. 몇 분쯤 흐른 뒤, ‘실재 독자님’이 내년에 발행할 예정인 신간 티저북을 안고 떠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O는 고개를 젓는다. 이번 결심 보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간이 나온다며 입을 댔으니 그것까진 만들어야 예의 아니겠냐고. 얼마 가지 않아 분명 후회하겠지만 바꾸기엔 이미 늦은 팔자 같다고. 8자는 뒤집어도 8자. 뫼비우스의 띠 모양도 8자. 타코야키도 가지런히 놓으면 8자. 그래, 여기 이 자리는 D-8, 문어 다리도 8개…….

그리고 O는 가벽의 문어들을 보고 빠르게 다가오다 멈칫한, 정확히 88번째 잠재 독자님과 눈을 마주치고 만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상대도 눈을 마주친 이상 그냥 돌아서기는 겸연쩍은지 천천히 다가와 테이블 위의 책을 집어 든다. O는 머릿속에서 8을 닮은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으며 8을 닮은 타코야키를 굽는 자신을 상상한다. 이제 88번째 소개말을 시작할 때다. O의 입술이 서서히 열린다.

POR 잡생각이 많고 조그만 일에 짜증을 내다 금세 웃고 술을 좋아하고 하염없이 철이 없습니다. 읽고 마시고 써지는 대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