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과 끝나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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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아지는 것들

“무한에 대한 글을 써 주세요.”

처음 ‘무한’이라는 단어를 받자마자 나는 무한소(無限小)를 떠올렸다. 백과사전에서 긁어 오자면 무한소란 “어떤 양수보다 작지만 0은 아닌 상태”다. x축에 닿을 듯 말 듯, 소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할 정도로 저공비행을 하는 그래프를 떠올린다. 그 그래프처럼, 나는 매일 이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작아진다. 언제라도 지평선과 충돌할 듯 아슬아슬한 그래프와 x축의 틈에 끼어들어 소득 없는 키 재기를 한다.

이전 회사에서 짧은 근무를 마치고 이직을 한 나는, 좋은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고 일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공간을 만났다. 행복할 줄만 알았지만 고민은 도리어 더 늘었다. 나는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을까?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은 될 수 있을까? 편집이라는 업에 대한 고민보다, 직업인으로서의 나,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친구는 애정을 덜어 내야 한다고 했다.

“너는 일과 사람을 너무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그 앞에서 스스로 너무 작아져.”

친구의 기나긴 조언을 요약하자면, 나는 지금 ‘프로’답지 않고 서툴며, 앞으로 나를 지키면서 일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덜게 될 거라고도 했다. 그런 말을 한 건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편집자를 일로 선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수없이, 영글기보다는 부서질 것을 예견하는 애정 어린 조언들을 들었다. 끝에는 늘 이런 말이 붙었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다행인지 나도 이제 조금은 사람들이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떠난 이와 떠날 이들을 본다. 나는 풋풋함이 그리워지지 못해서 부끄러워지는 시간을 산다.

아직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프로’가 되기 위해 좋아하는 마음을 덜어 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휘청거릴 때마다 좋아하는 문장을 모은 노트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독함과 능숙함 같은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현실적인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는 지면들은 마치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귀퉁이에 마티스의 문장이 있다.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2. 사라지는 것들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직 교복을 입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우리 집은 신문을 받아 보았고 한 귀퉁이에는 쿠르베의 그림 〈상처 입은 남자〉가 실려 있었다. 나는 사진을 오려 철로 된 과자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그게 내가 한 최초의 스크랩이었다. 볼품없이 얇은 신문 종이, 그 위에 인쇄되었던 쿠르베의 그림은 과자 상자와 함께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상처 입은 남자〉가 마땅한 제목일까? 그때의 내 눈에 그림 속 남자가 상처 입은 것을 넘어 죽어 간다는 사실은, 화질 낮은 신문지의 흑백 잉크 사이로도 명확하게 전해졌다. 나무에 등을 받치고 눈을 감은 남자는 평온해 보였다. 잔잔한 미소 때문인지, 꼭 남자가 배에 난 상처를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귀밑으로 내려온 검은 머리칼과 백인의 얼굴. 남자는 예수처럼 보이다가도, 원수에게 칼을 맞은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쿠르베가 〈상처 입은 ○○〉의 모델을 찾아 돌아다녔다면, 나는 절대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칼을 맞으면 맞는 대로, 아니, 살짝 까진 무릎에도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사람이니까. 슬픔을 숨기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나는 퇴근을 할 때마다 번뇌에 사로잡히는 초보 직장인이고, 매일 내가 받은 것과 그에 비해 갚지 못한 것의 저울 위에서 비틀거린다.

대학에서 미학 강의를 들을 때 쿠르베를 다시 만났다. 강의에서 만난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개척한 위대한 화가이자 진실을 추구한 강직한 인간이었다. 그는 모두가 신과 천사를 그릴 때 지옥에 떨어진 노동자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쿠르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돌 깨는 사람들〉보다 〈상처 입은 남자〉를 먼저 떠올렸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대학의 요청으로 남긴 연작, 〈학부 회화〉는 당시에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대학은 학부의 초인간적인 이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웅장한 그림을 기대했으나, 당시 클림트의 그림은 고통과 욕망이 날것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삽화에 가까웠다. 의뢰인들은 실망했다.

한때 미술 책자를 모을 때 나는 클림트에 대한 글도 읽었다. 클림트는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들을 많이 만났고, 금색을 즐겨 사용했으며, 〈키스〉 등 사랑받는 그림까지 남기며 인정받았다. 분명 밝고 근사한 이야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클림트의 일화는 저 〈학부 회화〉에 얽힌 이야기뿐이다. 사람들이 실망한 클림트. 열심히 그린 그림이 외면받는 클림트. ‘괜찮아, 운이 나빴을 뿐이야’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림을 그려 버린 클림트.

내가 클림트를 기억하는 방식과 나의 하루를 기억하는 방식은 별 차이가 없다. 좋은 것들은 어디론가 도려내고, 내가 하지 못한 것만을 기억에 남긴다.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한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매일 밤 또 다른 내가 그 그림을 보며 실망한다.

“음, 이건 제가 요청한 그림이 아닌데요. 좀 더 장대하면 좋겠는데.”

그러곤 덧붙인다.

“벌써 세 번째군요.”

클림트와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클림트는 〈학부 회화〉 3부작을 그려 나가며 매번 자기비판에 직면했음에도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3부작을 모두 똑같이 그렸다. 텅 비고, 아름답고, 서사적으로. 거의 의뢰인에게 반항하다시피. 나는 다르다. 나는 스스로에게 반항하지 못한다. ‘괜찮아, 운이 나빴을 뿐이야’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림을 그려 버린 나.

비비안 마이어는 아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수없이 남기면서도, 뒤늦게 그녀의 사진이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비극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군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눈에 정면으로 대고 찍는 것이 아닌, 배꼽께에 드는 작은 상자 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찍기도 했다. 아래에서 위로 찍는 방식의 카메라 때문에 그녀의 자화상은 구도가 독특하다. 더 독특한 것은 그녀의 눈빛이다. 그녀는 렌즈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사진 속 엇나간 시선을 따라가 보면, 비비안 마이어가 보는 것은 거울 속의 자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자신을 직면한다.

그녀는 직면하는 사람이지,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숨기고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친절한 보모이자 거리의 예술가였던 그녀는 노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사진 찍기를 중단한다. 그녀는 생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예술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미국 토박이도 아니었으며, 키는 180센티미터에 걸음걸이가 마치 군인과 같았다고 한다.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 준 것도 아니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닐 적에 그녀는 큼직한 코트와 챙이 큰 모자 밑으로 얼굴을 숨겼고, 사진기를 더는 들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사라졌다. 뒤늦게 그녀가 남긴 15만 장의 필름이 어느 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3. 끝나지 않는 것들

끝난 것보다 끝나지 않은 것이 많다. 나는 소멸, 무가치, 상실, 부재, 그런 단어들과 경쟁하기라도 하듯이 성실하게 작아진다. 나는 미완이다.

나는 앞으로도 퇴근을 할 때마다 고뇌에 빠질 것이다. 이건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은 이렇게 더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다. 가정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겠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매번 잘못된 그림을 그리고 매일 밤 잘하지도 못할 거면서 너무 큰 그림을 그리며 물감을 낭비해 버린 스스로를 비난할 것이다. 마음을 줄이지 못할 것이고 이것보다 더 작아지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제의 나보다 더 작아질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매일 출근할 것이다.

노트에는 여전히 쓸데없는 말이 가득하다. 나는 근사하고 재미난 것들이 아닌 깨지고 부서진 것들을 모은다. 앞으로도 상처 입은 남자와 비극을 음미하는 미소와 의뢰인에게 퇴짜 맞은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쿠르베는 결국 〈상처 입은 ○○〉의 모델을 찾는 대신 제 얼굴을 그려 넣었다. 책을 만들면서 내가 모은 것들과 비슷하게 살 것이다. 상처 입을 것이고 비극을 음미하는 미소를 지을 것이고 의뢰인에게 퇴짜를 맞을 것이다. 쿠르베처럼 나도 ‘상처 입은 ○○’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결국 내 얼굴을 그려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가였다. 그녀가 사진기를 놓았을 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의 ‘알게 될 것’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15만 장의 필름을 남겼다. 그녀가 셔터를 누르고 자신을 직면할 동안에 그녀는 분명한 ‘프로’ 사진가였다. 끝나지 않았던 동안 그녀는 숨을 수는 있어도 사라질 수는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화상처럼.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바퀴와 같습니다. 한번 올라서면, 끝까지 가야 해요.

여백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간혹 글을 쓰고 종종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