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의 미미짱

주초민 edited by 김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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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가 뭐였지? 멜로디는 조금 기억날 것도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나. 순진하고 예쁜 소녀들. 악당이 나타나면 소녀들은 변신을 하고, 요술봉을 휘두르며 악당을 물리치는. 악당은 완전히 당하지 않지. 조그마한 부상을 당하든가, 아니면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열세에 놓이든가. 그저 뒷걸음질을 치지. 궁둥이였나, 오른손이었나, 왼손이었나? 뭐 하나가 땅에 붙은 채로. 그런 만화의 주제가였다. 사실 멜로디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빤한 멜로디라고 할 순 없지만, 너무 화려했어. 뿅뿅거리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효과음들. 기억하기엔 힘들지.

미미짱과 오전까지 술을 마셨는데, 그것은 늘 그렇듯 우연한 만남.
술집들.
미미짱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미미짱은 이런저런 가방에 요런저런 소품들을 잔뜩 넣고 다녔어. 그 술집 사장과는 꽤 친한 사이 같더군. 나와서 춤을 추라고 하니까 대번에 나와 춤을 추더라니. 손님이라곤 나와 젊은 남녀 커플. 세 명뿐이었나. 몇 명 더 있던 것 같기도 한데. 미미짱의 춤이 끝나자 결국 나와 미미짱만이 남았나? 그래, 아무도 없었어. 소주나 한잔 더 할까요? 미미짱은 술을 잘 마시더군. 나보다는 확실히 잘 마셨어. 집이 어디세요? 집엔 어떻게 가세요? 집은 화곡동입니다. 화곡동이요? 그건 수원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화성인가? 아니요. 서울이에요. 서울? 저쪽 사거리에 서울 가는 버스가 있긴 한데, 지금은 끊겼겠네요. 상관없어요. 내일 첫차를 타고 갑니다. 출근 안 하세요? 안 합니다. 출근 같은 건.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마시다 빨간색,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였나. 나는 거기서 미끄러졌고, 두 번이나 세 번, 똑같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미미짱은 결국 가 버렸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고. 우리는 대화를 좀 나눴지. 춤은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유투브 보고 했죠, 뭐. 아, 유투브. 춤이 참 귀엽고 좋아요. 그러니까, 미미짱, 미미짱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까 그 술집 사장님도 미미짱이라고 부르시던데. 네, 괜찮아요. 아, 근데 ‘미미’가 본명은 아니죠? 아니죠, 당연히. 하하. 그럼 원래 이름이 뭐예요? 기철. 이기철. 아, 그 이름도 괜찮네요. 한잔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이가 저랑 비슷해 보이는데, 한 서른 정도 되셨어요? 서른셋이에요. 악수나 한번 합시다. 동갑이네. 우리. 곧 가신다고요?

어제. 어제는 망설임 없이 간다고 했다. 통장에 돈이 다 떨어졌으니까. 저녁 여섯 시부터 다음 날 여섯 시까지. 경기도 어디에 있는 신도시였다. 서울에 있는 한 회사가 신도시로 이사를 간다. 서울에서 온 이삿짐들을 사무실로 옮기고, 사무용 가구를 조립하고, 이삿짐을 정리하고, 그러니까, 이 회사는 월요일에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사무실이 월요일 오전에 작동하도록 새벽 안에 모든 걸 마쳐야 했다. 근무 시간은 다음날 여섯 시까지로 잡혀 있었지만,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하기야 일이 빨리 끝나도 갈 데가 없긴 하겠지만. 조건이 좋았다. 인력소 소장은 일당 11만 원을 불렀다. 다섯 시 반까지. 신도시, 무슨 사거리로.

대성 씨와 규찬 씨, 병준 씨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몇 번 봐 왔고, 친하진 않았지만 만나면 늘 반가운 사이긴 했다. 대성 씨는 한 달 만에 보는 것 같았고, 규찬 씨는 한 2주 됐나. 병준 씨는 지난주 화요일에 노량진에서 만났다. 공무원 학원 이사였다. 노량진이라기보다는 대방역에 더 가까이 있는 빌딩이었고 학원은 11층과 12층을 같이 쓰고 있었다. 학원은 좀 더 노량진 쪽으로, 노량진 초등학교 건너에 있는 큰 빌딩 8층과 9층으로 이사했다. 짐을 싸고, 내리고, 싣고, 올리고, 짐을 풀고, 정리까지. 일은 새벽 세 시에 끝났다. 10시간으로 잡혀 있던 일이 겨우 7시간 만에 끝났다. 작업반장은 밥을 먹고 갈 건지 물었다. 일 인당 식비가 6천 원씩 잡혀 있다고 했다. 안 먹고 가면 일당 7만 원에 붙여 준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화곡동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버스가 다니면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여름이니까.

7만 원보다는 7만 6천 원이 낫겠지. 걸으면서 땀을 식히는 것도 나쁘진 않아. 어떻게 할까? 그때 병준 씨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사실 작업반장의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은 빨랐고, 그는 내용의 주요 부분에서 말을 심하게 더듬댔다. 7만 원을 받을지, 7만 6천 원을 받을지, 이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 준 것은 나에게 다가온 병준 씨였다. 그는 목덜미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수건의 끝으로 연속해서 이마와 볼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우리는 얼굴을 튼 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지만, 드문드문 만났기에 어느 정도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형, 가요. 감자탕에 소주나 한잔 먹고 가요. 그는 뚱뚱했고, 좀 심하게 뚱뚱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매우 나쁜 생각이었다. 그는 기본이 네 공기였다. 네 공기 중에 한 공기는 국도 반찬도 없이 해치웠다. 술도 괴물처럼 마셨다. 물처럼, 화분에 부어지는 물처럼, 소주잔은 너무 작았고, 찍찍, 이빨 사이로 뿜어지는 침처럼 가늘게, 거대한 자루에 술이 뿌려졌고, 그러나 태도 안 났다. 병준 씨와 나는 주거니 받거니. 노량진에 있는 25시 감자탕집에서 나는 취했다. 작업반장은 술을 마신 사람과 안 마신 사람 일일이 계산해서 얼마씩 더 내야 할지 알려줬다. 나와 병준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6천 원을 더 냈다. 술을 마신 사람은 단 두 명, 나와 병준 씨뿐이었다. 친해지고 싶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는 조금 친해졌고, 분명 병준 씨가 나보다 몇 잔은 더 먹었을 거다. 그래, 그게 얼마냐. 그 정도는 내가 내지, 뭐.

소장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신도시에선 시간이 빨리 흐른다. 멀리 공원이 신도시를 가로질렀고, 아파트들은 별처럼 같은 모양이다. 금방 일곱 시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우리 넷은 아무도 몰랐다. 규찬 씨는 마음이 허약한 편이었다. 어쩌면 입이 허약했다. 자꾸만 걱정조로, 어떡해, 어떡해. 일당 날아갔네. 내일 일도 빵꾸 나는 거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헤르츠가 높다고 하면 되려나. 듣는 사람의 머리를 울렸고, 듣다 보면 짜증이 났다. 서른 살이나 먹은 자식이 애처럼 징징거리다니. 그래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하루로 맺어진 동료이기도 했고, 나 빼고 그 셋은 친한 친구였다. 뚱뚱한 놈, 마른 놈, 작고 단단한 놈. 인력소 소장도 소장의 똘마니인 작업반장도, 이 두 명의 소재를 알 것 같은 누구, 누구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이 신도시가 의심스러웠다.

우리는 회사가 이사를 온 것 같은 건물을 찾아 근처를 돌기로 했다. 그러니까 어디서 일해야 할지 우리가 찾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네 명이었다. 2인 1조. 병준 씨와 나는 한 조였다. 규찬 씨와 나이가 많은 대성 씨, 그러니까 마른 놈과 작고 단단한 놈이 한 조였다. 우리는 흩어졌고, 나는 뒤뚱뒤뚱 느리게 걸어가는 병준 씨를 따라갔다. 신도시는 깨끗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병준 씨라면, 거대한 기계 같은, 느리지만 유연하고 게을러 보이지만 성실한, 그 사람이라면 그 건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 이삿짐이 도착했을 것이다. 우리가 여섯 시부터 작업을 할 계획이었으니, 그런 시간들은 되도록 정확하게 지켜진다. 건물은 꽤나 큰 건물일 것이다. 이사 오는 회사가 여행사라고 했지? 지하주차장 구석에 엘리베이터 있고 그 앞에 짐들이 쌓여 있을 거야. 보통 회사 이사는 그런 식이니까. 우리는 지하주차장마다 들어갔다 나왔다. 여행사 사무실이 들어갈 것 같은 스타일의 건물, 정말 그런 건물 스타일이 있는 건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병준 씨는 그런 스타일의 건물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밤 여덟 시가 되었지만, 우리는 찾지 못했고, 우리는 사거리에서 다시 모였다. 인력소 소장이나 작업반장에겐 여전히 연락이 닿지 못했다. 하루 날리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내일 일도 빵꾸 나는 거 아니야? 또 규찬 씨가 말했다. 시간은 아홉 시였다.

모르겠다. 고기에 소주나 먹자. 병준 씨가 나에게, 형도 같이 가요. 그래, 가요. 계속 우는소리를 하던 규찬 씨는 잠깐 망설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술이야? 머리가 떨렸고, 나는 규찬 씨의 홀쭉한 볼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었다. 규찬 씨와 병준 씨는 서로 편하게 말하는 사이였는데, 규찬 씨는 꼭 여자친구처럼 병준 씨를 챙겼다. 저번에도 술 마시다가 다음 날 일을 못 갔잖아.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고. 그는 나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같은 말로 옆에 있는 대성 씨도 설득하려 했다. 대성 씨는 배가 고팠는지, 나지막하게 조금만 먹고 가자고 했고, 규찬 씨는 두 눈이 쏙 들어간 채 울상을 지었다.

8월 말이었지만 저녁마저도 더웠다. 우리는 다 반팔을 입고 있었다. 규찬 씨만 빼고. 그는 흔한, 아니 낡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양쪽 팔에는 부피감이 있는 팔 토시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그것을 착용하고 있었고, 아마도 서울에서부터 그걸 끼고 왔을 것이다. 에라, 소주나 마시자 하고 있었는데도, 팔 토시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것 좀 벗으면 안 될까?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규찬 씨는 병준 씨보다 한 살이 많았고, 그러니까 나보다는 세 살이 어렸다. 셋은 고기에 소주를 먹을 것인지, 바로 서울로 올라갈지를 놓고 점잖게 티격태격했고, 규찬 씨는 말싸움에서 밀렸고, 혼자 서울로 올라가기는 싫었는지, 투덜대며 고깃집으로 따라왔다.

야, 삼겹살이 일 인분에 만 오천 원이다. 대성 씨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데, 병준 씨와 규찬 씨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고, 말은 반말을 했다. 그는 내 앞에서 나이를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서른셋이라고 하자 나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했다. 삼겹살이 일 인분에 만 오천 원이었지만, 우리는 허탈한 상태였다. 허탈할 때면 씀씀이가 평소보다 더 커진다. 내가 이 허탈한 소비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규찬 씨만 빼고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그날 규찬 씨 빼곤 다 같이 나이순에 따라 말을 편히 하기로 했다. 규찬 씨는 막상 고기가 나오자 잘 먹었다. 말도 좀 줄어들었고. 그래도 말을 할 때면 주변 사람들의 머리를 울렸고. 알고 보니 규찬 씨는 선천적으로 자기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했다. 규찬 씨도 그게 콤플렉스라고 했다. 그는 이미 꺼진 지 오래된 소장의 핸드폰으로 십 분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소장의 전화가 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 혼자 짜증을 냈다. 내일도 빵꾸 나겠네. 목소리가 컸고, 대성 씨는 조용히 말하라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그러면 규찬 씨의 입이 쏙 들어갔다.

이 신도시에서 전철 막차가 몇 시더라? 일요일이잖아. 11시 반쯤이네. 아직 넉넉하네, 아직 넉넉하다가도 넙죽넙죽 받아먹는 술잔처럼 시간은 넙죽넙죽. 누군가 받아 삼켰겠지.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는 개수로 따지면 몇 개 안 된다. 자기들이 사는 동네 이야기, 여자 이야기, 그리고 이 이삿짐 일용직에 관한 이야기, 텔레비전에 관한 것.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야기에 끼기 힘들었고, 말없이 소주만 마셨다. 병준 씨가, 아, 내가 말을 놓기로 했지. 병준이가 형, 괜찮아요? 괜찮아. 취했어요? 그냥 좀 피곤해. 나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있는 장소가 싫어졌지만 무엇에든 너그러운 사람처럼 씩 웃었다.

음식값을 계산할 시간이 됐다. 그래, 긴장의 순간이 온 것이다. 나에게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10원도 없었다. 계산은 대성이 형이 했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 ‘계산만’ 했다. 그는 일 인당 얼마를 내야 할지 알려 줬다. 대성이 형은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고, 2대 8로 갈라진 머리칼에선 자꾸 긴 변이 흘러내려, 수시로 그걸 쓸어 넘겼다. 머리엔 뭘 발랐는지, 축축했고, 그건 약간 불결해 보였다. 피부의 노화 상태가 확실히 나머지 셋과는 달랐다. 모공의 깊이, 팔자 주름의 깊이. 그는 매우 늙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검지를 세워 한 명씩 가리키며, 얼마, 얼마, 얼마. 내야 할 돈은 규찬 씨만 빼고 다 똑같았다. 어어, 규찬 씨는 금액에 불만이 있었다. 그는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인 듯, 아무도 발언권을 줄 수 없음에도, 오른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색이 빠진 파란색 팔 토시가 눈에 거슬렸다. 그 팔 토시 좀 벗으면 안 돼? 나는 말하지 않았다. 대성이 형이나 병준이, 둘 다 저 팔 토시에 불만이 없다니. 나는 저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돈을 걷은 것은 나였다. 넷이서 8만 원어치나 먹었다. 많이도 먹었네. 삼겹살은 4인분에서 조금도 추가되지 않았다. 내가 현금이 없으니까, 카드로 할게요. 나한테 카드는 있냐? 무슨 카드? 강서도서관 회원카드? 카드는 있다. 우리은행 체크카드도 있고, 국민은행 체크카드도 있고, 하나은행 체크카드도 있다. 돈이 안 들어 있어서 그렇지. 그래서 나는 대성이 형에게 5만 8천 원을 받은 다음, 그대로 날라 버렸다. 다들 적당히 취해 있었으니까. 나도 억울하다고. 일당 11만 원을 벌려고 화곡동에서 이 신도시로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왔다고. 빌어먹을.

얼마나 뛰었을까. 그 별것도 아닌 인생들한테, 나는 겁을 먹긴 했다. 재빠르게 휴대폰도 꺼 버리고, 와 보니 여긴 냇가가 있고, 포클레인이 있고, ‘공사 중’ 팻말이 있다. 신도시의 바깥쪽은 아직 덜 지어졌구나. 모르겠다. 그냥 누워. 뺨으로 팔뚝으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흙바닥에 누웠다. 담뱃갑에 있던 담배를 모두 피웠다. 한 열 개비 됐나. 담배는 병준이한테서 훔쳐 온 것이었다. 피우고, 피우고. 피로가 서서히 몰려왔고, 졸렸지만, 잠에 들긴 싫었다. 잠을 참자 심장이 너무 세게 뛰었다. 개천의 물소리가 자세하게 들렸다. 개천은 더러울 것만 같았다. 신도시. 자꾸만 나는 확장되었다. 이대로 동해까지 닿을지도 몰랐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 나는 개천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웃옷을 벗은 다음 여기저기를 적당히 씻었다. 멀리 신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옷을 비춰 보니 나는 생각보다 더럽지 않았다.

아마 어쩔 수 없이 서울로 갔을 거야. 그 자식들은 막차를 탈 수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나는 다르다고, 막차를 안 타도 괜찮아. 다음 날 첫차를 타면 되지. 휴대폰을 켰다. 문자가 와 있겠지. 그래, 시원하게 욕들도 좀 적어 놓고, 그랬을 테지. 음? 깨끗하네. 그래도 대성이 형 인간성이 괜찮았어. 그 사람은 확실히 어른이지. 분명히, 나를 가리키며 불쌍한 인생, 불쌍한 인생, 했을 거야. 그러면서 규찬 씨랑 병준이한테는 그냥 내버려 두자고 했겠지. 다시 볼 땐 정말 죽여 버리자, 이런 말들을 했을지도 몰라. 니들이 그래야지. 별수 있겠어. 좋아. 이제 진짜 밤이다. 신도시의 불빛이 더 예리해졌어. 술을 마시러 가자.

저야말로 예술가죠. 아, 참고로 저는 예술대학을 나왔습니다. 학교에선 연기를 배웠어요. 제발, 인생이 연기라느니, 사는 게 연기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연기는 배워야 하는 거고요. 정말 열심히 연습을 해야 하는 거고요. 그리고 술도 잘 마셔야 하고요. 자기 영업도 잘해야 하는 거예요.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가 깐에도 갔어요. 거기 인터넷에, 아니 관둬요. 아무튼 깐에 가서 상을 받았다니까요. 물론 제가 직접 깐에 간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단편영화였으니까요. 저는 연기라는 걸 열심히 연습했고, 늘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가 깐에도 가는 거죠. 여기서 자랑해 보건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연기는 절대 안 할 겁니다. 거기엔 다들 개새끼들뿐이니까.

예술이란 게 그래요. 계속 하나를 하다 보면, 둘을 알고, 둘을 알다 보면, 또 셋을 알고. 어느 것이든 비슷비슷하더군요. 저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 봤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사람, 음악을 한다는 사람, 글을 쓴다는 사람. 뭐 다들 비슷비슷해요. 그러니까 예술의 원리라는 게. 이론에 강하신가요? 그럼 저는 안 됩니다. 저는 이론에는 약합니다. 이론도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아시겠지만, 꼭 이론대로 되는 건 아니에요. 사장님도 아시죠? 사장님 말씀하시는 게 심상치 않으신 것 같은데, 사장님도 예술대학 나오셨어요? 예? 정말요? 아. 사장님은 글을 쓰셨군요. 어떻게 좀 상도 받고 성공도 하고 하셨나요? 아, 그렇죠. 그게 뭐 꼭 그럴 필요가 없죠. 저도 압니다. 예술가라면 결국 자기 작품과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죠. 남의 눈치나 슬금슬금 보다 보면, 그냥 인생 종치는 겁니다. 근데 여기 바텐더분은 따로 안 계시나 봐요.

술이 취한 이 불쌍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예술 지랄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여자의 따뜻한 목소리일 뿐이다. 바텐더도 없는 술집에 들어가서 거지 같은 말이나 나누다 보니, 손님도 저뿐인데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나는 이미 불을 댕겨 버렸다. 사장은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다. 손님! 금연구역입니다. 그는 점잖게 화를 냈고, 그러자 콧구멍이 넓어졌고, 그는 결국 고릴라로 변해 버렸다. 실내는 온통 검은색 벽이었다. 머리 위 높이에 거울들이 둘러쳐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서는 또 검은색인 천장만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말이 없어지는 틈에는 그 거울을 통해 천장을 보았는데, 그것이 거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장은 볼륨을 최소한으로 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기도 많이 참았다고? 내가 그렇게 버릇이 없었나? 아니, 그래도 내가 손님인데. 씨발, 얼마야? 뭐, 2만 4천 원? 맥주 네 병. 맞지? 그게, 2만 4천 원이나 해? 사장은 겉에 입고 있던 남방을 벗었고, 굵은 팔뚝을 내비쳤다. 저건 허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겁을 주려고 괜히 그래 본다는 것을. 까짓것 한번 속아 주자. 나는 정중한 자세로 돌변했다. 그리고 돈을 냈다. 천 원짜리가 주머니에서 스무 장쯤 튀어나왔다. 분명 이 천 원짜리들은 규찬이한테서 나온 것이리. 쩨쩨한 녀석. 갑니다. 가. 죄송합니다. 괜히.

신도시의 거리는 점점 지쳐갔다. 월요일 아침은 아직도 멀찌감치 서 있었고, 건물들도 멀리 서 있었다. 나는 신도시의 중심 같아 보이는 광장을 지났고, 먹자골목처럼 꾸며진, 중심이 비어 있는 건물을 통과했다. 술집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잠을 자겠지. 안 자곤 못 사니까. 나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캔커피 하나와 담배 한 갑을 샀다.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병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덩치가 컸다. 그는 캔맥주를 테이블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분홍색 옷은 어깨께에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완전 민소매는 아니었지만, 소매는 매우 짧았고, 치마까지는 아니었지만 원피스처럼 아래로 긴 옷이었다. 그는 머리에 분홍색 보닛을 쓰고 있었는데, 보닛은 그의 머리에 비해서 매우 작았고 정수리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붙어 있었다. 조선 시대 보부상이 패랭이를 쓸 때 그러했듯, 머리에 붙은 모자는 턱 아래에서 묶인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턱 아래에는 꽃받침처럼 리본 매듭이 달려 있었다. 그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고, 나는 신기하게 그를 쳐다보았고, 몇 번 눈이 마주쳤지만, 그쪽에서 눈을 피했다.

나는 갑자기 장난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막 떠오른 ‘세일러 문’이라는 말을 혼잣말하듯 내뱉었는데, 그가 나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카드캡터 체리’라는 말을 했는데, 그는 더욱 집중해서 날 쳐다보았고,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모두 어렸을 적 봤던 마법소녀 만화의 제목들이다. 그는 나를 보고 씩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가 내 쪽 테이블로 왔다. 앉아 있던 데서 일어나자 키가 180센티미터는 넘어 보였다. 나는 사람을 무조건 경계하는 편이라, 조금 위축됐다. 그러나 그가 환하게 웃는 덕에 곧 나는 마음을 풀었다. 가을이 곧 시작될 모양인지, 반팔을 입은 나에게 바람은 그제야 차가웠다.

좀 앉아도 되죠? 그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고 앉았고,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살진 볼, 눈은 웃는 상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모자 아래로 헝클어진 채 떠 있는 머리카락은 딱 봐도 가늘고 숱이 부족했는데, 내 머리카락이 딱 그랬기 때문에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그가 먼저 말했다. 혹시 예전에 창성호에 있지 않았나요? 창성호? 창성호가 뭐죠? 배요. 어선. 배요? 어선? 아, 아니시구나. 저는 그때 같이 배 탄 사람인 줄 알았어요. 모습이 좀 닮아서요. 그 사람도 저만 보면 ‘세일러 문’, ‘카드캡터 체리’ 했거든요. 저는 배를 탄 적이 없습니다. 그는 실례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절반쯤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조금 화가 났다. 그 예의바름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질 게 뻔했다. 남자가 등을 돌린 뒤에 나는 담배를 물었다. 내가 배를 탄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를 탄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배를 타 보고 싶은 적은 있었지. 그건 남자라면 한번쯤 품는 꿈이니까.

남자는 편의점 앞으로 넓게 펼쳐진 광장으로 나아갔다. 높은 건물들이 사방에서, 정확하게 네 군데서 감싸고 있었다. 길은 건물들 사이로 나 있었고, 광장은 길이 만들어 낸 거대한 십자가의 교차점이었다. 남자의 손에는 이런저런 짐들이 들려 있었다. 덩치가 커서인지 짐들이 많았음에도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분홍색 원피스 아래로 흰색 반바지가 보였다가 말았다가. 파도 위를 걷고 있는 것일까.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아까 그 못난이 삼 형제랑 갔던 고깃집이 저 뒤에 있는 건가. 아무튼 광장을 마주하는 곳이었다. 분수가 리듬을 타며 올라왔고, 아이들은 늦은 여름, 늦은 밤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게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는 광장의 중심에서 멈췄고, 나와의 거리는 실제론 겨우 삼사십 미터밖에 안 됐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리에 남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갑갑하다고 했다. 이런 데서는 하루도 못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데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좀 갑갑하긴 해도 있을 게 다 있고, 깔끔하니까. 병준이가 말했고, 대성이 형이 이어서 말했다. 도시 자체에 뭔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이 신도시는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도시는 마름모꼴을 하고 있고, 마름모의 꼭짓점마다 중심각이 90도인 부채꼴의 땅이 맞닿아 있다. 광장의 중심에 있는 돌판에는 신도시의 역사와 모양, 수십 개의 건설사, 무슨 시의 시장이 적혀 있었다. 돌판은 책 모양이었다. 그 책,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왠지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은, 돌로 된 책은 펼쳐져 있었고, 영원히 그 페이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 위에 남자는 제법 큰 스피커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음악이 나왔다. 만화의 주제가 같았다. 악한이 나타나면, 소녀들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마법을 써서 재빠르게 악한을 무너뜨린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소녀들의 일상이 더욱 재미나지. 소녀들 사이의 긴장 넘치는 로맨스나, 잘생기고 키 큰 선생님, 그래, 그 만화 속 남자는 분명 거세했을 거야. 그렇다면 부모들은? 부모들은 없다.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상상력의 세계니까. 부모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그래? 그래서 그 소녀들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야. 그 나이, 그 아름다움. 그러니까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남자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 끝났다. 아침까지 이어질 기나긴 고요의 시작점으로 그는 정지해 있었다. 양팔은 지면과 대각선을 이룬 채 길게 뻗어 있고, 무릎은 양쪽으로 벌어지게 살짝 구부렸고, 얼굴은 하늘을 향해 뻗은 왼팔의 끝을 향했다. 넓고 통통한 볼이 얼굴에 매달려 있어, 긴장감을 그려냈다. 그렇게 한참, 아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시간 전에 내가 돈을 들고 튀었던,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멈추었던, 신도시의 경계가 생각났다. 그래, 거기엔 뭐가 있었지? 공사 중이었지. 그곳은 네 개의 부채꼴 중심 중 하나였다. 신도시의 끝이자, 원의 중심으로 향하는 곳. 그곳은 또 다른 광장의 중심인가. 어쩌면, 나는 거기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기로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결국 저 남자는 신도시의 가장 외곽으로 가 있는 것이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거구나.

저기요. 저기요. 나는 이미 그가 춤을 추는 사이에 그의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자세를 풀지 않았다. 나는 아까 그 남자에게 화가 났던 게 생각났다. 바로 옆에서 보니, 남자는 더욱 거대해 보였고, 굽힌 채로 굳은 무릎을 세게 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에레이, 찼다. 남자는 쓰러졌다. 그러더니 다시 일어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나는 좀 미안했지만, 남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몇십 초 지났고, 그러자 자세를 풀었다. 저기요.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남자는 볼에 흐르는 땀 몇 방울을 닦아 냈고, 호흡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 했던 놀인데, 저는 이걸 하는 걸 좋아해요. 무슨 놀인데요? 어렸을 때, 집에는 낡은 비디오가 있었어요. 낡은 비디오테이프도 있었고요. 저한테는 형이 한 명 있었고요. 아, 그 비디오테이프는 형 거였어요. 소녀들이 나왔고요. 저와 형은 그 비디오를 봐요. 비디오는 완전히 마지막 장면이 되기 전에 멈춘 채로 몇 분 동안 정지해요. 정확히는 2분 8초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멈춰 있는 게 재미있어서, 그 장면을 따라 했죠. 방금 그 자세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나오지 않았고, 비디오는 끝납니다. 남자는 짐을 챙겼다. 광장 중심에서 목소리는 조금 울렸고, 그의 성량은 풍부해서 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형이 죽었어요. 작년에. 형은 저기 저 빌딩을 짓는 데서 일했죠. 남자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을 위로 한 손을 어느 빌딩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럼 형 때문인 거군요? 형을 위로하려고?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벌써 5년도 넘었어요. 이 춤을 시작한 지. 술 한잔 마시러 갈래요? 네, 그럽시다. 근데 제가 돈이 없습니다. 아까만 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정말 없습니다. 내게는 이만 원 정도가 남아 있어야 했지만, 나는 어디선지, 그것들을 다 빠트리고 말았다. 점잖게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광장은 넓어요. 밀폐된 공간 같지만 바람도 잘 불고. 내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남자는 돈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제가 다 살게요. 시간은 새벽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근데 지금 이 시간에 술을 마실 데가 있어요? 도시는 이미 거대하게 잠들어 있었다. 여긴 신도시라서 지금까지 문을 연 데가 없을 것 같은데……. 한 군데는 알아요. 남자는 짐을 다 챙겼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 여기군요. 문을 열자 종이 울렸고,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아까 그 고릴라였는데, 살짝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나를 보고는 좀 놀란 것 같았다. 남자는 사장에게 살랑살랑 달려가서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고, 둘은 반갑게 서로의 팔뚝을 만졌다. 이내 사장은 바로 들어가 우리를 손님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아까 드시던 걸로 드시겠어요? 이건 나에게 오는 말이었다. 네. 사장은 아까 내가 마셨던 맥주를 꺼내왔다. 미미짱! 사장은 애초부터 그 남자를 보고 미미짱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그제야 좀 활기가 돌아서, 둘이 막 대화하려던 순간에 끼어들었다. 아, 이름이 미미짱이군요. 나는 사장에게도 이름을 부탁했으나 사장은 자기는 그냥 사장이라고 했다. 그럼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러나 미미짱과 사장 누구도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고, 나는 그것에 좀 속이 상했지만,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켜자 괜찮아졌다. 둘은 좀 전에 왔다 간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남자 세 명이었어. 여기에 남자가 세 명이나 왔다고요? 그렇다니까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랑 중간 키에 비대한 남자, 키가 작고 머리가 축축한 남자가 왔었지. 많이 마셨나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누군가를 죽일 거라고 하더군, 화가 아주 많이 났던데. 미미짱은 남자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세 명이나 몰려다닌다는 것에 놀라 했다. 여기서는 그렇게 다니다간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것이 신도시의 규칙이니까요. 이 규칙은 지금 생겨났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는 위험한 곳이에요. 우리도 벌써 세 명이니까. 사장은 그 규칙이 언제쯤 사라지는지, 언제쯤 사라질 것 같은지 미미짱에게 물었고, 나는 중간에서, 혹시 여기 출입문이 저거 하나밖에 없나요? 나는 좀 전에 들어왔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저거 하나뿐입니다. 미미짱은 계속 ‘이제 위험해집니다. 우리는’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런 말을 계속하는 게 스스로도 겁이 났는지 말을 멈추었고, 사장은 미미짱에게 오늘은 춤 안 보여줘? 미미짱은 춤을 추는 걸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게의 한쪽 벽 쪽으로 가서 준비하기 시작했고, 사장이 음악을 틀자 거기에 맞춰 춤을 췄다.

춤은 마지막 동작에서 아까처럼 멈췄다. 그때 종소리가 들렸고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니 여자는? 여자는 없어? 무슨 술집에 여자가 없어? 미미짱은 여전히 마지막 자세에서 멈춰 있었고, 저 거지 같은 새끼는 뭐야. 다행히 그 삼 형제는 아니었다. 그저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술에 꽤 취해 있어서, 앞 뒤 옆, 아무 데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릴라 사장은 입고 있던 남방을 벗었고, 거대한 팔뚝을 내보이며, 바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오지 못했는데, 그건 그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꿈 안에서 종종 작동하곤 하는 식의 어떤 힘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미짱은 위험에 처했다. 남자들, 거의 열다섯 명 정도였다. 사장은 바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서도 말은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이 뭉쳐 다니니까 위험해지는 거라고. 아저씨들은 그렇게 위험을 더욱 즐기고 있었다. 위험을 늘리고 높이고, 결국 미미짱은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래도 미미짱은 조그만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저 맞았고, 아저씨들은 밖으로 나갔고, 미미짱은 다시 일어나 자세를 취했고 남은 정지 시간을 채웠다.

그 남자들도 올까요? 사장은 방금 그 아저씨들을 말하는지 물었다. 아니요. 아저씨들은 제가 보기에도 안 올 것 같아요. 그들이 범죄자는 아니니까요. 미미짱, 여기 휴지. 이마가 까졌네요. 끈이 떨어져서 그 모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쓰기 힘들겠고. 그의 모자가 가리고 있던 정수리 부근에서는 원형탈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미미짱에게 조그만 애정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자 미미짱은 다정하게 대하지 마. 알았어?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나에게 들이밀었고, 나는 다시 원래 그랬던 것처럼 버릇없이 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애정이란 것은 일방은 일방적인 겁니다. 그건 폭력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없애야 하죠.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도 애정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사장은 안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 남자들, 그러니까 아까 그 못나 보이는 삼 형제도 다시 돌아올까요? 모르죠. 아침이 되기 전까진 이 근처 어딘가에 있겠죠. 이제 새벽 네 시. 미미짱은 사장에게 얼음이 많이 든 얼음물을 부탁했고, 잔의 아랫부분으로 부어오른 볼을 마사지했다. 아저씨들을 고소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아저씨들은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까.

미미짱은 폭행으로부터 몸 이곳저곳을 수습했고, 입에서는 드문드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내가 걱정됐다. 매를 맞는 건 싫었다. 그때 문이 열렸고 종소리가 들렸고, 이제 남녀 커플이 들어왔다. 미미짱은 또 춤을 추겠지. 그럼 나는 잠에서 깨어나겠지. 아닌가, 우리는 소주를 마셔야 한다. 어른 같은 태도를 좀 가져 봐요. 커플은 연인 사이는 아닌 듯했다. 여자는 자꾸만 남자에게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했다.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런 척이라도 하라고 했다. 여기는 신도시라고요. 남자는 겨우 그런 말로 항변했다. 모든 게 어디서 넘어오는 거지? 미미짱은 그 커플을 한 번 봤고, 사장을 쳐다봤다. 사장은 신호를 보냈다. 춤을 춰도 좋다는 거였다. 나오고 있던 음악이 멈췄고, 미미짱의 테마가 흘러나왔다. 미미짱은 조용히, 모자 없이 하려니까 낯설어. 나는 정말 미미짱에게 애정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모자는 패랭이 같았어요. 미미짱은 내 말을 못 듣고 이미 저 앞으로 나가 춤을 췄다. 오늘 밤에만 나는 그의 춤을 세 번 보았다. 미미짱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여자는 남자를 일으켰고, 재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나가 버렸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완전히 어두웠다. 술집의 창문에서는 바깥이 잘 보였다. 여기가 몇 층이지? 저 밑으로 광장의 중심이 있었고, 건물 사이, 저 멀리로 아슬아슬하게 신도시의 끝이 있었다. 그게 신도시의 끝인 줄 안 것은 그 자리에 타워크레인 한 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타워크레인은 꼭대기에 빨간 점멸등을 달고 있었다. 깜박깜박. 그러자 해가 떴다. 여기가 몇 층이나 되죠? 사장은 22층이라고 했다. 22층? 꽤 높네요. 미미짱은 바에 앉아 깊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산을 했고, 자기랑 사장은 여기서 잔다고 했다. 나는 아쉬워서, 그럼 소주 한 잔만 더 해요. 소주요?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요. 그럼 언제 마시죠? 언제? 모르죠. 언젠간 마시겠죠. 그럼 이만. 나는 가게에서 쫓겨났다. 매우 점잖게 쫓겨났다. 엘리베이터를 탔고, 지상 1층에서 내렸다. 거기엔 못난이 삼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밤새 나를 찾으러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밤이 끝나 버렸다고 했다.

그러게요. 원래 우리의 일도 이때쯤 끝났을 텐데. 그럼 갑시다. 집으로. 나는 화곡동에 삽니다. 셋은 고릴라 사장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장의 팔뚝 두께가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광장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고, 나는 그들이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이제 정말 그런 일을 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정말 돈이 없었어요. 밤에는 누구나 한번쯤 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셋 중에 누구도, 그리고 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거다. 대성이 형은 끝까지 그런 이름은 없다고 했고, 규찬 씨는 그런 대성이 형에게, 세상에는 없는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병준이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 형은 우리보다 똑똑하잖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은 어딘가엔 있겠지? 내가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하자, 그들 셋은 사라졌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나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날이 밝고 보니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네 채의 건물은 조금씩 달랐다. 우리는 건물 지붕이 뾰족한 것과 넓적한 것 사이로 난 길로 직진했고, 조금 걸어가자 지하철역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 분명했다. 건물들 안에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니. 지하철역 앞에는 신도시인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하나뿐이었고, 에스컬레이터는 한 줄밖에 설 수 없는 거였다. 나는 줄을 섰고, 우리가 줄을 서자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걷기 시작했고, 우리는 좀 더 빠르게 지하철역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울로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미미짱을 다시 만났다. 미미짱은 말했다. 나를 화곡동으로 데려가 줘요. 약속한 것처럼. 그랬다. 우리는.

서울에는 24시간 감자탕집이 많아요. 까치산역 부근만 해도 몇 개가 있죠. 나는 미미짱과 소주를 마시러 갔다. 우리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소주를 마시며 조금은 친해졌다. 나는 집으로 갔고, 미미짱은 다시 신도시로 돌아갔다. 나는 소품들이 가득 든 미미짱의 가방을 생각했다. 그것들의 불편함에 대해서, 나는 ‘불편함’이라는 말을 떠올린 것을 바로 반성했다. 그러고는 깊은 잠이었다. 깊은 잠. 생각해 보니 저번 주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을 조금씩밖에 자지 않았다. 그건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의 반지하, 나의 조그만 방, 나는 그 방 어디에 있든지, 발을 디딘 곳이 높은 건물의 난간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착각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엎드려 누운 상태, 완전히 추락한 상태만이 안전했다. 그렇게 누워 있다 보니 허리가 아팠고, 나는 너무 일하지 않아서 돈도 없었고, 결국엔 미미짱을 만난 것이다.

미미짱, 사랑해요.
당신을 이 소설 속에서 매우 주관적으로 그려내 버린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미미짱은 똑, 당신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러나, 딱, (애써) 당신이죠.
나는 내 의식 위에 있는, 의식의 전제 층들을 살펴보던 중, 당신에 대해 발동하였던가…… 학습된 남성성,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폭력에너지를 감지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의식이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그렇다고 굳이 발휘될 일도 없는, 잠재된 폭력에너지를 반성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빌어먹을 소장 개새끼는 집안일 핑계를 댔다. 씨발 새끼, 씨발 새끼. 씨벌놈, 씨벌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일을 보내 놓고, 전화를 안 받아? 나는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할까 했지만, 그저 엎드려 있었다. 그 순간부터 병준이와 규찬 씨, 대성이 형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저주를 담은 말들이었다. 그것은 나의 조상들로부터 (이 셋 덕분에 생각해 보게 된) 먼 미래의 후손들까지 (나에게도 후손이 있을 수 있을까?) 모두를 통틀어 저주하는 말들이었다. 그들에겐 피로처럼, 화가 밀려왔을 것이다. 저주는 그토록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옷장 아래로 밀어 넣어 버렸다. 진동소리는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징. 지글란. 징. 지글란. 징. 지글란. 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