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커(ENKR)의 ∞ 접점들

엔커 edited by 지다율

첫 번째,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 NO-ISBN: On Self-publishing』

재경은 베를린에서 아티스트북을 전시 매체로 큐레이션하는 갤러리, 아인부흐하우스(einBuch.haus)를 운영하면서 좋은 아티스트북 및 이론서를 자연스레 많이 접하다 보니, 이를 친구들에게 종종 소개하곤 한다. 같은 맥락으로, 2018년, 다예가 서울 마포비축기지에서 독립출판을 주제로 친구들과 세미나를 열었을 때, 재경은 다예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와 이 책의 편집자 버나드 셀러(Bernhard Cella)에 대한 정보를 SNS 메신저로 공유했다. 덕분에 다예는 세미나 개최 후 들었던 여러 궁금증이 해소되었지만, 한편으론, 이 책이 이미 절판되었음을 아쉬워하며 이를 번역해서 한국 독자들이 읽을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2019년, 재경이 서울에 방문했을 때 다예는 이 책을 시작으로 아티스트북 전문 번역 출판사를 같이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재경은 단번에 거절을 했다. 당시 재경은 아인부흐하우스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했다.

0번째, 첫 만남

다예와 재경은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이하 RCA) 재학 시절에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같은 건물에서 지냈지만 전공이 달라서인지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다. 재경이 기억하는 RCA에서 다예의 모습은 학교 전시에서 여러 책을 꽂을 수 있는 재킷을 입고 다니며 그 책을 배포하는 퍼포먼스를 했던 것이 전부였다. 다예가 기억하는 재경은 본인 키보다 더 큰 작품들을 선보이며, 소리나 빛이 흘러나와 관객의 경험과 감각을 향상시키는 공간감 있는 설치작품을 만드는 설치작가였다. 인연이 닿아서였을까. 학교 졸업을 앞두고 우연히 제안서 하나를 함께 만들게 되면서 짧지만 깊은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재경은 설치작품을 전시장에서 철거한 후의 공허함을 느꼈고, 다예는 아티스트북 출판사 테넌트북스(Tenant Books)를 막 시작하여 책의 유통을 고민하고 있었다.

두 번째, 엔커(ENKR)의 시작

2019년, 서울에서 다예에게 첫 제안을 받고 6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재경은 다예에게 데이비드 호르비츠(David Horvitz)의 『책을 훔치는 완벽한 방법(How to shoplift books)』을 에디션 타우베(Edition Taube)와 함께 공동 출판하면서 엔커 출판사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했다. 글 번역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공동 출판으로 제작비가 적은 첫 프로젝트는 온라인상으로만 만나 책을 함께 번역 및 제작하고 그 후 다예가 유통을, 재경이 홍보를 담당하는 다소 생소한 출판 제작 과정을 리스크 적게 실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엔커의 첫 출판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 엔커의 활동은 2020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번째
엔커의 활동으로 맺어진 또 다른 접점들

엔커는 『책을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시작으로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 『The Weather』, 『지속가능한 독립출판 모델을 향해(Towards A Self Sustaining Publishing Model)』 총 4권의 책을 번역 출판했다. 한국은 매해 쏟아지는 독립 출판물 제작량, 독립출판사 수에 비해 독립출판물에 대한 이론서가 많지 않다.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엔커는 격년으로 비교적 깊이 있는 아티스트북 이론서를 번역 출판하고 다른 해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아티스트북을 번역하며 지치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하는 출판사를 운영하고자 한다. 새 출판물이 나올 때마다, 메일, 공유 문서 파일, 메시지, 스카이프 등의 힘을 빌려 한국과 독일의 시차 8시간을 둔 각자의 장소에서 많은 글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2021년,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이하 UE) 13이 온/오프라인으로 기획되고,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가 UE100에 선정되면서 나주 및 베를린에 살아 페어에 직접 참여하기 힘든 상황에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책 홍보가 되었고, 나흘간 200여 권의 책이 판매되는 기쁜 소식도 접했었다. 책이 발행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을 추천해 주는 독자이자 편집자, 기자님들 덕분에 꾸준히 독립출판물을 제작 혹은 연구하는 이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2022년, 다예와 재경은 오프라인으로 약 4년 만에 UE14 북페어 및 더레퍼런스(The Reference)의 ‘확장된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출판 연구 세미나’의 발주자로 참여하면서 엔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덕분에 생겨난 새로운 인연인 독자들과도 현장에서 직접 인사를 나누고 잠깐이나마 독립출판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보이지 않는 공동체가 생기고, 이들이 엔커의 행보를 지지해 주니 매우 든든하다.
엔커는 내년에 아네테 길버트(Annette Gilbert)가 편집한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출판(Publishing as Artistic Practice)』을 번역 출판할 계획이며, 한국의 좋은 아티스트북들을 찾아 해외에 소개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엔커 해외의 아티스트북을 한국에, 한국의 아티스트북을 해외에 소개하는 아티스트북 전문 출판사다. 독일과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재경과 노다예가 함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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