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두 가지 생각

김진형

1.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아내는 양평에서 홍천으로 향하는 6번 국도로부터 차를 타고 삼사십 분을 더 들어가야 이를 수 있는 곳에서 자랐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내가 자란 시골 동네와 폐교된 옛 초등학교 터를 산책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참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네.” 아내가 말했다. “농촌의 일상은 잠시의 낭만도 질책하는 분주함의 연속이지. 도시의 소음은 없지만 풀벌레 소리로 가득해지는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나는 또다시 막막해져서 미칠 것만 같았어. 차라리 난 혼잡한 도시의 거리에서 마음이 편안해져.”

누군가의 일상에 대해서 함부로 비평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극사실주의적 현실’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난 아내를 통해 배웠다. 세상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들을 추상의 이미지로 대체하려고 한다. “인간은 극사실주의 속에서 태어나 점점 더 느슨해져서 아주 대략적인 점묘법으로 끝나 결국엔 추상의 먼지로 날아가 버린다.”(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 』,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우리는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와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사이에서 살아간다. 일상은 ‘온갖 일(凡百事)’과 ‘예삿일(茶飯事)’로 규정되는 삶의 총체이자 지평이다. 우리는 일상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날마다 일어나야 하고 날마다 일을 해야 하고 날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속절없이 잠든다. 불면의 밤은 표준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에선 고통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어도 기어코 다시 깨어나야 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식도락을 누리는 이들로 넘쳐나지만, 정작 현실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반복적 행위에 가깝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고달픈 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학교나 직장에 가는 것이 고통일 것이나 그것을 외면하고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수 없다.

도시든 시골이든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해 버린 사회는 ‘예삿일’을 ‘온갖 일’로 대체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기준을 화폐가치로 환원시킨다. 생산성을 산출해 내지 못하는 일상의 예삿일은 가치 없는 일로 치부된다. 그러고는 온갖 일을 거뜬히 해내기 위한 온갖 기술을 연마하라고 다그친다. 수신(修身), 즉 몸과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공부는 오늘날 기술(technic) 수준으로 다뤄지는 듯하다. 그러나 예삿일 속에서, 계절의 순환과 날마다 수행하는 사소한 행위들과 의미 없어 보이는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존재는 존재다움을 회복한다. 존재가 존재다워질 때 온갖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다움의 회복을 지향한다. 예삿일과 온갖 일은 우리를 지치게도 하고 허망하게도 하지만, 각성된 존재는 예삿일과 온갖 일을 통해 진보에 이르기도 한다. 생태계에 있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통틀어 진보를 이뤄 낸 거의 유일한 존재다(또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결정적 도구는 어김없이 텍스트, 진보를 추동해 내는 사유의 텍스트였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는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라고 말했고, 장석주는 이를 인용하며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장석주, 『일상의 인문학』, 민음사, 2012). 에코와 장석주가 생물학적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삶, 죽지 못해 사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은 그것을 지향한다. 죽은 삶으로부터의 구원 말이다. 온갖 일은 그리고 예삿일은 그즈음에서 재해석된다.

김남주 시인(1945~1994)은 유신 정권에 의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수감된 후 옥중에서 교도관에게 펜과 종이를 얻어 시대의 무도한 권력에 맞섰던 여러 저항시인들의 시를 번역하였다. 나는 일상의 지난함을 지날 때, 혹은 일상의 무력함을 견뎌 내야 할 때, 이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를 읽는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루이 아라공,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하인리히 하이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김남주 옮김, 푸른숲, 2018).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전문.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기필코 존재하겠다고, 시인은 결심한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무시로 내리는 빗방울조차도 경계하며 살아가기를 각오한다. 살해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은 삶에 길을 낸다.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시인은 그 시를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해 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시인들의 텍스트를 읽으며 우리의 존재를 각성해 낸다. 그러므로 김현(1942~1990)은 옳다. “나는 있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나는 타자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김현, 『문학과 유토피아』, 문학과지성사, 1980)

아내는 시골의 낭만을 동경하던 내게 시골의 진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아내 덕분에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 속에 숨겨진 숱한 고통의 일상들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시골의 아름다움 대신 아내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많은 텍스트를 읽고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내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책은 누군가의 사연이 되어야 한다.

2. 사상의 지도: 희극과 비극 사이

우리 집에는 〈2007년 4월 24일의 세상〉, 〈2010년 5월 3일의 세상〉이란 제목의 스크랩북 두 권이 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만들어 놓은 것으로, 논조의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아이가 태어난 그날의 신문을 종류별로 사서 스크랩해 놓은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놓여 있는 세상의 정황을, 언젠가 저 스크랩북이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하여 기어코 저 아이들이 세상을 이겨 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그날의 신문들을 살펴본다. 짧게는 십여 분, 길게는 한 시간 남짓, 어떤 날은 기사 제목들만 챙기고 어떤 날은 여러 기사와 칼럼을 읽고 스크랩해 두기도 한다. 회사로 배달되어 온 신문을 훑어본다. 기사의 배치에는 편집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신문에 실린 광고의 면면은 언론의 쇠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SNS의 타임라인은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주 간혹 잠재적 저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기획과 홍보를 위한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도 한다. 평일과 주말의 유입률, 일상성과 이슈의 간극, 무엇보다 나의 타임라인은 사심과 편향의 목록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내가 근무했던 출판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트렌드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책, 음식, 패션, 핫플레이스, 영화, 방송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사례를 조사한 후 성별, 세대별, 직군별 트렌드 흐름을 공유하고, 이를 기획회의와 마케팅회의에서 활용했다. 부지런한 편집자와 마케터는 모임을 만들어 연말마다 몇몇 기관에서 발표하는 메가트렌드(megatrends) 전망을 정리하여 스터디했다.

기획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SNS에서 저자나 아이템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장의 흐름에 조응하거나 트렌드를 한껏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수많은 책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나는 책은 트렌드, 시장 상황, 심지어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 맞서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텍스트를 복원하는 일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편집자는 날마다 뉴스를 읽으며 지금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겠지만, 그 이전에 그 정황과 맥락을 읽어 낼 수 있는 ‘사상의 지도’를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편집자는 트렌드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늘상 고민하겠지만, 동시에 트렌드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텍스트를 열망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사상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시대적 조류에 휩쓸려 길을 잃지 않으며, 견고하게 벼려진 텍스트가 트렌드의 감각을 입을 때 독자를 한껏 매혹하는 책이 될 수 있다.

편집자라면 사상의 지도를 가진 자라야 한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원고가, 내가 만들려고 하는 책이 어떤 사상적 흐름과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사는 기원전 8세기경 눈먼 시인 호메로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기원전 428년경~기원전 348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 등으로 이어지는 그리스철학은 물론 서구 인문학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가 적나라한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항하는 영웅 서사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은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에 그치는 반면, 아킬레우스는 비범한 행동으로 정점에 도달하며 죽음에 이른다. 운명에 굴하지 않은 그의 영광스러운 죽음은 비극적이되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디세이아』는 또 다른 영웅 오디세이아가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10년간의 여정을 다룬다.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디세이아』는 희극으로 끝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두 영웅은 비극을 통과한 후에 희극에 도착한다. 비극은 그리스철학에서 운명에 갇힌 인간의 조건을 성찰해 내는 중요한 주제다. 희극을 품은 그리스인들은 서구적 낭만을 발명해 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의 운명과 그에 처한 현실을 재연해 냈다면, 철학자들은 우리가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철학자들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찾아내고자 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플라톤의 ‘대화’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규정하기 위한 최적의 형식이었다.

기독교의 시대였던 중세는 비극을 용인하지 않았다. 오직 신의 은총이 없는 세계가 비극일 뿐이므로, 기독교가 지배한 세상에서는 오직 천국의 기쁨만이 존재해야 했다. 희망이란 오직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만 허락된 은총이었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시인들은 사악한 자들의 번영과 의로운 자들의 불행을 다룬다는 점에서 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미학적 측면에서 비극과 희극을 둘 다 잘 쓸 수 있는 시인이 없다고 일갈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비극과 희극 모두 잘 쓰는 탁월한 시인이 등장하였다. 바로 셰익스피어(1564~1616)다.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근대 문학이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통용되는 문학은 모두 근대의 산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고대와 근대, 기독교와 타 종교의 경계에 놓여 있는 상징적 존재다. 비극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세상에 돌아왔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희극에 이르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거나 종교적 도그마에 굴복하지 않은 채, 각각의 서사를 통해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운명과 사랑과 낭만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 냈다. 모름지기 서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사유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모더니즘의 시대로 불리며, 철학, 문학, 예술, 건축, 과학,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전통적인 기반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려는 경향성이 시대정신으로 작동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보편성과 영원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며 엄청난 진보와 퇴행을 동시에 경험하여 모더니즘은 급격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여 20세기와 21세기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절대적 힘을 가진 외부의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퍼포먼스에 의해 세계와 인간의 역사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 퍼포먼스의 역동을 마르크스는 프락시스(실천)로, 니체는 초인적 힘으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으로, 소쉬르는 체계(구조)라고 불렀다(대안연구공동체 기획, 『20세기 사상 지도』, 부키, 2012).

모더니즘의 세상에서 태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풍자했던 찰리 채플린(1889~1977)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서사처럼, 세상은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이다. 사상가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현상을 향해 질문하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 내며 본질을 추구한 이들이다. 사상은 세상의 중력을 거스른 이들로부터 생성된다. 편집자는 사상가를 설득하고 사상을 편집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근육은 그 과정에서 길러진다. ‘사상의 텍스트’를 벼려 내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지도를 갖는 일이다.

김진형 #틈입하는편집자 soli02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