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가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 〈이니셰린의 밴시〉

김윤우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서 감독의 전작을 찾아보니 오래전에 본 영화가 있었다. 〈킬러들의 도시〉(In Bruges, 2008, 원제를 꼭 써야 할 것만 같다)였다. 〈킬러들의 수다〉를 보려다가 보게 되었는지(영화를 많이 보던 때도 아니었으니 이랬을 가능성이 다소 있다……), 콜린 패럴을 알고 봤는지(아닌 것 같다, 내가 이 배우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한 것은 〈랍스터〉부터이다) 등등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으니 감독의 인장은 확실한 편이겠다.

내전이 일어난 1923년 아일랜드의 작고 조용한 섬 이니셰린. 어제까지만 해도 절친했던 친구 콜름이 파우릭에게 갑자기 절교를 선언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서사를 주로 이끌고 가는 것은 파우릭의 분투이다. 파우릭은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은(혹은 잠수 이별을 경험한) 연인처럼, 끈질기게 콜름에게 이유를 묻는다. 다정하게 달래도 보고 소리도 질러 보고 화도 내 본다. 견디지 못한 콜름이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도, 파우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호하게 마음을 먹은 콜름이 자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고 공갈해도 파우릭은 지치지 않고, 결국 콜름은 단지한다.

그러나 영화는 파우릭의 분투만을 담지는 않는다. 영화는 콜름과 파우릭을 포함해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 그리고 극 중에서 가장 순수해 보이는 도미닉 등 주요 등장인물 4명이 (이니셰린이라는 엄청나게 지루한 섬의 물리적 공간에 묶인,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견딜 수밖에 없는 고독의) 운명을 어떻게 마주하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자 하고, 누군가는 주변 사람들과 다정함을 나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AT 필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대사(“This is how I fight.”) 등등이 떠올랐고, 기묘한 기시감(한정된 공간이라는 연극적인 느낌, 지독한 블랙 코미디, 그리고―아마 이게 가장 큰 이유였을 텐데―주연 배우 두 명이 같다)도 느꼈고, 그물같이 펼쳐진 들판과 바다의 아름다움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콜름의 말이었다.

시오반과 자네의 다정함을 기억하는 일?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걸세. 50년 후면 우리 중에 아무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200년 전에 살던 한 남자의 음악은……(Remember Siobhan and your niceness? No one will. In 50 years’ time, no one will remember any of us. Yet the music of a man who lived two centuries ago……).

현시대에 필요한 질문을 담은 책, 오늘의 독자가 읽어야 할 책, 국내 독자에게 소개해야 할 작품……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듣고―다시 생각해 보니 표현이 이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고, 팔리는 기획이 좋은 기획이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괜한 반발심을 느꼈던 적이 있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잘 되는 책들의 목록을 보며 배가 아픈 나머지 3년 뒤에도 이 책들이 읽히나 한번 보자 하는 고약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늦어지고 있습니다’에 ‘탈진할 것 같습니다’여도 (그리고 많이 팔리지 않을 미래가 분명해도) 좋은 책이니까 내 마음(?)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불행히도 그리고 다행히도 이런 적은 거의 없다……).

‘미래에 남을 예술을 위해서 한정된 시간을 써야 하므로 시간 낭비에 가까운 너와의 대화를 이제는 할 수 없다’는 콜름의 반복되는 대사를 들으면서 그 과거의 마음들을 떠올렸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왜 나와야 하는지(그리고 왜 내가 이 글을 만져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책을 만들며 시덥잖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그 마음을. 자신이 만드는 곡의 제목은 “이니셰린의 밴시”이고, 그 음악이 파우릭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으면 한다는 콜름의 고백을 들으며 그 마음이 극도로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꼽아 본다. 최소한 네 자릿수의 물리적인 책이 나온다는 것, 판권에 이름이 남는다는 것, 누군가는 계속 쓰고 만들고 읽는다는 것……. (2023/12/4)


김윤우 | 출판공동체 편않에서 기획 및 편집 등을 맡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