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가 아니다] 다 준비했어: 〈RRR〉

김윤우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S. S. 라자몰리, 2022

“너희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다 준비했어.”[2010년대 초 3대 가요계 연예기획사 중 SM의 모토라는 농담으로, 나머지로는 “……내가 좋아하는 걸 준비했어”(YG)와 “……내가 나왔어”(JYP)가 있다] 〈RRR〉을 보고 나서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일 것이다.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에는 최고의 남자 빔과 라주 두 명의 우정을 그리는 버디 무비의 색채를 주축으로 온갖 장르가 뒤섞여 있다. 화려한 블록버스터(빔과 라주가 위험에 빠진 소년을 멋지게 구한다), 액션(영화 내내), 차력(빔이 호랑이를 때려눕힌다), 서스펜스(관객은 라주가 경찰인 것을 알고 있다), 스릴러(관객은 라주의 눈물 나는 과거를―초반에는―모른다), 가족 드라마(빔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길을 떠난다), 심지어 로맨스(라주를 기다리는 오래된 연인이 있다)까지 가득하다. 가히 맥시멀리즘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인도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뮤지컬(영화 내내 2)도 있다.

나는 이 영화의 감독 S. S. 라자몰리의 전작 〈바후발리: 더 비기닝〉을 보고 웃겨서 기절하는 바람에(아마 이 영화를 보기 직전에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봐서 더 재미있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들〉도 훌륭한 영화이다) 〈바후발리: 폭풍의 신〉을 보지 못했다. (〈더 비기닝〉을 본 지 오늘로 1년 반이 넘었지만 아직이다). 그래서 〈RRR〉을 보기 전, 라자몰리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다가 지루해서 잠이 들고 말았다’(Parasite didn’t work much for me. I felt the film was a little slow in the beginning. We started watching the film a little bit late around 10 pm, and so halfway through, I dozed off and slept.”)고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후발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눈 것이므로 나는 〈RRR〉을 끝까지 감상함으로써 이제야 라자몰리의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본 셈인데, 그러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감독은 어떻게 3시간짜리(혹은 5시간짜리) 영화에 온갖 요소를 때려 넣으면서도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갈 수가 있지?

Rahul Sipligunj & Kaala Bhairava, Naatu Naatu (from “RRR, Telugu Movie), An M. M. Keeravaani Musical, 2020. 서스펜더를 이용한 안무가 너무 좋다.

나는 〈RRR〉을 집에서 TV(넷플릭스)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는 뜻이다. 〈RRR〉에는 오래된 영화를 보면 종종 마주할 수 있는 인터미션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등장인물들이 마지막 곡을 부르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밈(meme)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황당하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은 영화 초반부터 감독이 쌓아 올린 서사의 힘을 받으니 모두 납득되었다. 빔은 애초에 호랑이를 때려 잡는 사람이므로 달리는 오토바이 정도는 가뿐히 멈출 수 있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노래 몇 곡을 부르고 춤을 추면 해소된다. 당연하다, 노래와 춤이 있는데.

(밑줄을 죽죽 치고) “선생님의 ○○○ 이야기에 독자가 더욱더 집중할 수 있도록 이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하면 어떨지요.” “이 부분도 삭제하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장황하므로 독자의 독서 호흡을 고려하여 ……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교정지를 발송하면서 수없이 썼던 문장이다. 어떤 부분이 재미있으니 좀 더 써 달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 옮겨 쓰고 보니 독자 운운한 부분이 역시 비겁한 것 같다.) 저자에 따라 달랐지만, 보통 교정지를 돌려 받으면 분량이 줄고는 했다. 나는 그렇게 잘라 내고 덜어 내는 것이 그 책에 더 좋은 방향일 거라고, 저자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납득시켰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RRR〉 마지막에 최고의 남자들 빔과 라주가 힘을 합칠 때 등장하는―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물리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은―액션들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박수를, 혹시 내가 삭제해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삭제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제는 밑줄을 치며 삭제를 제안하기보다는 “읽으면서 너무 좋았던 부분은 형광펜으로 표시”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어쩌면 더 재미있는 편집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2023/5/31)


김윤우 | 출판공동체 편않에서 기획 및 편집 등을 맡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