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가 아니다] “디그니티는 제일 중요한 거예요”: 「이모」

손정빈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 2016

원래 “이것은 ○○이/가 아니다” 마지막 글을 쓰기 위해 읽어 놓은 책이 있었고, 원고 역시 어느 정도 써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 업무 중에 어느 노(老)배우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어서 예전에 읽었던 단편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배우가 했던 말과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남겨 둬야 한다는 조급함 같은 걸 느꼈다. 원고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배우는 윤여정이고, 그 소설은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이모」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인 이모의 이름은 윤경호. 두 주인공이 같은 윤 씨라는 것도 공교롭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글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자존감이다. 너무 흔한 주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뻔할 정도로 자주 언급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지난 1월 26일 배우 윤여정을 만났다. 2020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후 4년 만에 한국 영화로 돌아온 데다가 그가 국내 언론과 공식 인터뷰에 나선 것은 2018년 〈그것만이 내 세상〉 이후 6년 만이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 몸담은 거의 모든 기자가 그를 만나러 나왔다. 그 사이 윤여정은 오스카 배우가 되었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특유의 직설 화법, 흔치 않은 유머 감각, 농담을 할 때와 속마음을 꺼내 보여야 할 때를 구분하는 센스.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윤여정 역시 많은 말을 했다. 기록해 놓고 싶은 말이 여럿 있었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그의 표현대로라면 “디그니티(dignity)”에 관한 것이 유난히 내 마음에 와서 박혔다.

그날 인터뷰는 여러 주제를 거쳐 윤여정이 출연 중인 애플TV 시리즈 〈파친코〉로 흘러갔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인물 ‘선자’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전 이 여자의 디그니티를 담아 내고 싶었어요. 디그니티를 우리말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위엄이라는 말은 조금 과하고, 내 느낌엔 자존감이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아무튼 그 디그니티라는 건 잘살고 못살고와는 상관없죠. 무식과 유식과도 상관없어요. 장사하는 분들을 비하하는 건 아닙니다만 시장에서 김치 장사를 하더라도[선자는 김치 장사를 한다] 자존감이 있다는 거죠. 그 자존감은 내 일에 부끄러움이 없고, 내가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자부심과 성실함에서 나오죠. 디그니티는 정말 중요한 거예요.”

윤여정이 말한 선자의 디그니티에 관한 얘기는 자연스럽게 윤여정의 디그니티에 관한 얘기로 옮겨 갔다. 그 단어가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키워드라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제 디그니티요……. 제일 중요한 거죠. 때로 친절한 것과 비굴한 것이 같이 갈 때가 있어요. 전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전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비굴하고 싶지는 않아요. 가령 어떤 감독에게 잘 보여서 선택받는다? 그건 아니죠. 내가 잘해서 뽑혀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내 정신이에요. 나는 나라는 겁니다. 나는 내가 되어야죠. 이런 내 정신을 그 여자(선자)에게 넣고 싶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하니까 제작진이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잘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이모」의 윤경호는 말하자면 오랜 세월 디그니티를 상실했던 여자다. 물론 그가 열심히 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윤경호는 오히려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가족을 위해서. 맏딸이었던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객사한 후 가장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생활비를 보태고 동생들 학비를 댔다. 동생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금전적인 지원을 중단했으나 남동생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냈을 땐 그 빚을 떠안아 갚아야 했다. 그런 그는 55세까지 쉬지 않고 일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또 한 번 남동생의 빚을 갚을 상황에 몰리자 ‘자신을 찾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고, 2년여간 혼자 살다가 췌장암으로 두 달간 투병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다가 삶을 마감한 한 여성의 기구한 인생에 관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내가 본 「이모」는 그런 소설이 아니다. 「이모」는 윤경호 생애에 깃든 비참함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무너진 디그니티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회복해 낸 2년이라는 시간을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려 낸다. 윤경호는 직장 생활 마지막 5년간 번 돈을 가족에게 한 푼도 내놓지 않고 악착같이 모아 1억 5,000만 원을 만들었고, 이 돈으로 보증금이 1억 원인 작은 아파트를 구해서 남은 돈으로 일을 하지 않은 채 살았다. 한 달 생활비는 65만 원, 그중 30만 원이 월세였으니까 윤경호는 겨우 30만 원을 가지고 생활했다.

가족도 없고 돈도 없는 삶.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삶. 그러나 윤경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쓰면서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한 듯하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하루에 담배를 딱 네 개비 피우고, 일요일에는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자신만을 위해 요리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의 생활 수준에선 사치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윤경호는 누구도 돕지 않고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규칙적으로 살았다. 그는 타인의 동정은 고사하고 자기 연민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엔 윤경호가 자기 삶을 한탄하는 구절이나 그와 비슷한 대목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나는 「이모」를 다시 읽으면서 앞서 윤여정을 처음 인터뷰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60살 때부턴 날 위해 연기하기로 했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그때부터는 사치도 좀 하고 살았어요.” 먹고 살기 위해,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윤여정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랬던 그는 더는 생존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자 본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기를 했다. 하고 싶은 연기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윤여정이 오로지 윤여정으로 살았다는 말일 것이다. 40살도, 50살도 아니고 무려 60살 때부터. 노배우의 스토리는 윤경호 이야기와 놀랍게 닮아 있다. 다만 윤여정은 그런 결심을 한 이후로 십수 년간 활동 중이고, 윤경호는 2년 만에 죽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모」는 췌장암에 걸린 윤경호의 외모를 이렇게 표현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매우 말랐고, 거칠고 주름진 피부에, 숱이 듬성듬성 빠진 머리를 모자나 스카프로 가리지 않고 그대로 내놓고 있어 아사 직전의 원숭이처럼 보였다.”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이상한 건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참 힘들게 산 여자 윤경호를 리스펙트(respect)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그가 디그니티를 되찾아 온 그 2년여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이모」는 윤경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한다. “아주 괴팍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편도 아니다. 누구한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차라리 자기가 손해를 보고 마는 성격이지.” 나는 이 대목에서 윤여정을 또 떠올렸다.(2024/1/31)


손정빈 | 『뉴시스』 영화 담당 기자. 영화 매거진 『무비고어』 편집장. 2013년부터 『뉴시스』에서 일했다. 사회부·정치부·산업부를 거쳤고, 영화를 가장 오래 맡았다. 2021년 『무비고어』를 창간했고 2022년 『손정빈의 환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