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가 아니다] 미치게 완벽한 사랑: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손정빈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2016

한탸가 압축기로 들어가는 장면을 모두 본 뒤 책을 덮지 않고 곧바로 1장 첫 대목으로 되돌아왔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내가 확인하려고 했던 건 바로 저 단어였던 것 같다. 러브스토리. 132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지만 마지막 장에 진입할 때쯤엔 이 책이 어떤 말들로 시작되었는지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첫 번째 장 초반부에 어떤 말이 있었다고. 그렇게 찾아낸 게 “온전한 러브스토리”였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짧게 요약해야 한다면, 나는 다른 말을 가져오기보다는 바로 저 표현을 직접 인용할 것이다. 다만 이 사랑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곤 하는 그런 사랑 같은 게 아니다. 일방적인 데다가 미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착이고 강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이 사랑이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탸가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사랑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다. 이 중 하나가 한탸에 관한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 개는 한탸 가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한탸의 사랑은 온전해지는 데 성공했으나 다른 두 개의 사랑은 그러지 못했다. 일단 한탸의 어머니. 한탸의 모친은 어느 날 사망했고 한탸는 어머니를 화장했다. 한탸는 유골함을 외삼촌에게 전달했는데, 외삼촌은 어느 화창한 여름날 무밭에서 김을 매다가 누이의 유골을 무밭에 뿌렸다. 누이가 무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탸의 모친은 그렇게 무를 사랑한 사람이 되어 무밭으로 가 무가 되었다. 다음은 외삼촌. 한탸의 외삼촌은 어느 날 뇌졸중으로 죽었다. 외삼촌은 40년간 철도원으로 일하며 선로 변경 일을 했다. 은퇴한 뒤에도 그 일 없이 살 수 없게 된 외삼촌은 폐쇄된 낡은 역에서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정원에 들여놨고, 바로 그 선로 변경 초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이 7월 폭염 속에서 보름간 방치된 탓에 외삼촌은 그 초소에 눌어붙어 버렸다. 외삼촌은 선로 변경 초소를 사랑한 사람이 되어서 선로 변경 초소가 되었다.

무라면 사족을 못 썼던 사람은 무밭에 뿌려졌고 선로 변경이 삶이었던 사람은 선로 변경 초소에서 죽었으니 그들의 사랑이 완성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걸 선택한 적이 없기에 미완성이라고 해야 한다. 어머니가 무를 그토록 좋아했다는 건 외삼촌의 주장이다. 외삼촌은 어머니를 무를 사랑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겨우 무가 되었다. 어머니가 실제로 무를 좋아했고 무밭에 유골이 뿌려지길 원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사랑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런 사랑을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외삼촌은 어머니보다는 처지가 낫다. 은퇴를 하고도 집 정원에 선로 변경 초소를 들여놓을 정도로 그 일밖에 몰랐는데, 선로 변경 초소에서 죽었으니까. 그러나 그 죽음 역시 외삼촌이 선택한 게 아니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병 때문에 어떤 위엄도 갖추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선로 변경 초소에서 죽는 게 그가 원했던 최후일 수는 있다.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죽음이 그가 선택한 사랑 표현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도 온전해지지 못했다.

이들과 달리 한탸는 자기 의지로,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과 함께 죽음을 택했다. 35년간 폐지 압축 일을 하며 책을 사랑했던 그는 그가 사랑했던 그 책들이 최후를 맞던 방식과 동일하게 압축기 안으로 들어가 짜부라져 죽었다. 책을 사랑했던 한탸는 책과 똑같이 죽었으니, 그가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사랑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말은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폐지 압축 일을 사랑했고 책을 사랑했던 한탸는 압축기 안으로 들어가 책처럼 죽음으로써 책이 되었다. 그래서 한탸는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이토록 온전한 사랑을 해냈으니까. 35년간 지하실에 처박혀 폐지 압축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일자리를 뺏길 수밖에 없는 시대적 역사적 흐름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자살하고만 남자. 그런데 한탸는 불쌍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한탸의 어머니처럼, 한탸의 외삼촌처럼 사라져 갈 때 그는 자신이 삶을 바쳐 사랑했던 것과 함께 온전히 사라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보다 더 미치게 완벽하게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다. (2023/7/7)

덧. 나는 이런 한탸를 보면서 어떤 캐릭터 하나를 떠올렸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이다. 프로도와 함께 죽을 고비를 건너며 여정의 끝에 온 골룸은 끝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절대반지를 손에 넣고 신이 나서 날뛴다. 그리고 그는 저 뜨거운 용암 속으로 절대반지와 함께 떨어져 죽고 만다. 그때 골룸은 웃고 있었다. 절대반지와 함께 녹아 버리겠지만, 그럼으로써 절대반지 그 자체가 됐으니까. 골룸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온전한 사랑을 한 유일한 캐릭터가 아닌가.


손정빈 | 『뉴시스』 영화 담당 기자. 영화 매거진 『무비고어』 편집장. 2013년부터 『뉴시스』에서 일했다. 사회부·정치부·산업부를 거쳤고, 영화를 가장 오래 맡았다. 2021년 『무비고어』를 창간했고 2022년 『손정빈의 환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