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가 아니다] 사건들: 〈레벤느망〉

김윤우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레벤느망〉, 오드리 디완, 2021

2021년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레벤느망〉은 이 영화가 한 작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다.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사건』(L’Événement, 2000)이다. 『사건』은 작가가 스물셋이던 해 10월부터 그다음 해 1월까지, 그가 경험한 갑작스러운 임신과 중절까지의 과정에 관한 회고록이다. 그는 1963년 그에게 닥친 ‘사건’(혹은 ‘사고’)의 이야기를 그로부터 4년 후 프랑스에서 피임약이 합법화되어도, 그리고 12년 후 임신중절법(베유 법)이 제정되어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바로 그 일이었을 거다.……내가 겪은 임신 중절 체험―그것도 불법으로―이 끝나 버린 이야기의 형식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그 경험을 묻히게 놔둘 타당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내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 사건을 당시의 실재 속에서 과감하게 맞설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임신 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건』, 아니 에르노, 윤석헌 옮김, 민음사, 2019, 19~20쪽.

임신 중절을 한 경험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유일한 죄책감”(79쪽)을 느낀 그는 그로부터 약 40여 년이 지나 새로운 천 년을 앞두었을 때에야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몇 달 동안 꾸준히 메모한 수첩과 내면 일기들”(19쪽), “그 문장들”(20쪽)을 참고하며 그 일을 글로 써 내려간다. 흥미롭게도, 『사건』에는 이 작품을 쓰는 그의 현재의 생각들이 괄호로 덧붙는다. 마치 주석처럼.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전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며 그 심연을 탐구하는 작품이 된다.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안은 수업 시간에 교수가 갑작스럽게 던진 질문에도 바로 조리 있게 대답을 내놓는 명민한 학생이다. 가까운 친구들과 디스코테크에 가서 춤을 추면서 이성과의 미묘한 성적 긴장감을 즐기기도 하고, 주말이면 부모님 집에 돌아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똑똑하고 평범한 대학생의 드라마로만 보이던 영화는 그가 속옷을 확인하고 노트에 “없음, 오늘도 또”라고 쓰는 장면, 그리고 “3주 차”라는 텍스트와 함께 장르가 바뀌어 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의 일상은 요동친다. 안은 어렵사리 임신 사실을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들은 안을 도와주기는커녕 배신한다. 임신 중절을 도운 의사도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첫 고학력자인 안은 보수적인 부모님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남자친구는 ‘왜 아직도 임신을 해결하지 않았느냐’며 안의 책임으로만 돌린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멀어지며 안은 철저히 고립된다.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에 걸린 안은 그러나 일상을 회복하고 쓰는 인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가지고 있던 책과 물건들을 팔아 수술 비용을 마련하고, 끝내는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건다.

안이 친구들과 같이 속옷을 고쳐 입는 첫 장면에서부터 무사히 시험을 보는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 내내, 〈레벤느망〉에는 짧은 내래이션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안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안의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 관객이 힌트를 얻을 만한 사운드도 들리지 않는다.

관객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마주하는 것은 거의 정사각형으로 느껴질 정도의 비율의 화면에 가득 찬 안이다. 일반적인 영화보다 훨씬 좁은 이 영화의 화면에 안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거의 담기지 않는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안의 모습―그의 말, 표정, 행동, 반응―을 끈질기게 좇는 카메라는 관객과 안의 거리를 완전히 좁히려고 하는 것 같다. 원작의 표현을 빌리자면, “각각의 이미지와 ‘다시 만난다’라는 육체적인 감각이 느껴”(19쪽)질 정도이다.

요컨대 1960년대 에르노의 ‘사건’이 『사건』이 되며 언어를 획득했다면, 20여 년이 지나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레벤느망〉은 『사건』의 단어들에 육체를 부여한다. 육체를 획득한 영화는 관객에게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체험을 선사한다. 안의 내면을 표현하는 대사 한 줄 없이, 집요하게 안의 육체(만)를 선택함으로써, 안의 사건을 우리의 사건으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글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임을 ‘사건들’은 명징하게 보여준다. (2023/10/8)


김윤우 | 출판공동체 편않에서 기획 및 편집 등을 맡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