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빈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의 단편 만화 『룩 백』을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관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을 성장물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망설여진다. 그 단어에는 일반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스토리가 있다. 미숙했던 이가 일련의 사건을 거쳐 성숙해져 간다는 식의 얘기 말이다. 언뜻 보면 『룩 백』 역시 이 얼개에 적당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만화를 그리는 두 소녀, 이들의 만남과 합작, 교감, 그리고 이별과 좌절, 새로운 출발. 역시나 성장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기승전결이지만 선뜻 이렇게 정리해 버리지 못하는 건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 하나 때문이다. 이 일은 두 소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을 만큼 중차대한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발생한다. 어떤 전조도 없이, 아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어나 삶을 뒤집어 엎는다. 이건 성장물이 아니라 호러물에나 쓰일 법한 방식이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룩 백』은 성장물인가.
을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관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을 성장물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망설여진다. 그 단어에는 일반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스토리가 있다. 미숙했던 이가 일련의 사건을 거쳐 성숙해져 간다는 식의 얘기 말이다. 언뜻 보면 『룩 백』 역시 이 얼개에 적당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만화를 그리는 두 소녀, 이들의 만남과 합작, 교감, 그리고 이별과 좌절, 새로운 출발. 역시나 성장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기승전결이지만 선뜻 이렇게 정리해 버리지 못하는 건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 하나 때문이다. 이 일은 두 소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을 만큼 중차대한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발생한다. 어떤 전조도 없이, 아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어나 삶을 뒤집어 엎는다. 이건 성장물이 아니라 호러물에나 쓰일 법한 방식이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룩 백』은 성장물인가.
쿄모토는 죽었다. ‘묻지마 살인’에 희생당했다. 쿄모토는 잘못한 게 없다. 쿄모토를 죽인 남자 역시 그를 노리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다. 그 남자가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뒤 실행에 옮길 때 쿄모토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룩 백』은 이 작품의 주인공 두 명 중 한 명을 이렇게 간단히 제거해 버린다. 그러고 나서 이 불행을 쿄모토의 유일한 친구 후지노에게 집어던진다. 이제 후지노는 비극을 떠안고 나아가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당황스러운 건 이것이다. 이 사건을 그려내기 전까지 『룩 백』의 스토리는 정합(整合)했다. 후지모토 작가는 성장물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진행시켜야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쿄모토의 사망에 이르러선 논리를 부러 포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비약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별안간 벌어진 그 죽음에 『룩 백』의 정수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룩 백』에는 죽음이 일렁인다. 쿄모토가 살해당한 게 이 작품 속 가장 큰 사건이기도 하지만 이 죽음만 있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죽음이 더 있다. 가장 먼저 묘사된 죽음은 후지노가 그린 만화에 있다.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주려고 그의 집을 찾았다가 방에 틀어박힌 쿄모토에게 심술이 나 네 컷 만화를 하나 그린다. 히키코모리인 쿄모토가 방에서 나오지 않다가 끝내 백골이 된 채 발견된 모습이다. 그리고 이 만화를 우연찮게 쿄모토가 본다. 또 다른 죽음은 쿄모토가 그린 만화에 있다. 이 만화는 살해당할 뻔한 쿄모토를 후지노가 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쿄모토를 구원한 뒤 뒤돌아선 후지노의 등엔 커다란 흉기가 꽂혀 있다. 죽음이 직접 묘사되진 않으나 후지노는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다만 이 만화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만화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건 두 소녀가 만나 만화를 그린다는 이야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후지모토 작가는 죽음에 매달린다. 왜 이러는 걸까. 성장 만화를 그린다면서 죽음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룩 백』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죽음을 되짚어 봐야 한다. 먼저 쿄모토의 죽음.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는 히키코모리인 쿄모토는 후지노를 만나 밖으로 나온다. 그는 후지노의 어시스턴트가 돼 후지노가 기획한 만화의 배경을 담당한다. 호흡이 잘 맞는 두 사람은 정식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후지노는 이번에도 쿄모토와 함께하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이제 후지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그렇게 쿄모토는 후지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서 미대에 간다.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더 성장시키고 싶어 한다. 그렇게 미대에 간 쿄모토는 학교에 침입한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면 이 죽음은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쿄모토가 성장을 택한 대가는 죽음이었다.’
이번엔 후지노가 그린 만화 속 쿄모토의 죽음. 이 만화는 쿄모토를 세상으로 끌어낸다. 평소 후지노가 학교 신문에 그린 만화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우연히 방 안으로 들어온 후지노의 만화를 본 뒤 “후지노 선생님”이 찾아왔다는 걸 알고는 득달같이 뛰쳐나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후지노가 그린 만화는 은둔형 외톨이 세계 대회에서 1등을 한 쿄모토가 백골로 발견된다는 내용. 쿄모토는 갑작스럽게 방에 침입한 그 만화를 본 뒤 집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 선택이 후지노가 왔다는 것 자체 때문인지, 후지노의 만화를 보고나서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후지노가 그린 수많은 만화를 일일이 기억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 감화돼 있다는 걸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 만화 때문에 잠시나마 은둔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쿄모토는 후지노의 만화를 이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집에 있어 봤자 어차피 죽는다. 그러니 밖으로 나와라.’
이 두 개의 죽음은 원인과 결과가 돼 후지노를 괴롭힌다. 쿄모토가 죽는 만화를 그림으로써 그가 집 밖으로 나왔고 집 밖으로 나옴으로써 새로운 욕망에 눈을 떴으며 그 욕망을 따라감으로써 죽게 됐으니 이건 모두 내 탓이라는 것. 언뜻 보면 후지노가 생각한 이 인과 관계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후지노의 관점. 시점을 후지노가 아닌 쿄모토로 돌리면 이 두 가지 죽음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후지노가 아니었다면 만화에서처럼 쿄모토는 방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그의 세계는 방구석이 전부였을 수 있다. 그러나 후지노를 통해 쿄모토는 더 넓은 세상을 알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밖으로 나가자. 밖으로 나가서 후지노를 만나자.’ 그는 이 선택으로 새 사람이 됐다. 물론 쿄모토의 죽음은 비극이다. 다만 쿄모토는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이미 죽음을 예상했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후지노라는 세계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갔다.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제 마지막 죽음. 쿄모토의 만화 속 후지노의 죽음(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죽음을 자책할 때, 『룩 백』은 두 사람이 졸업장 건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걸 가정하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보여준다. 쿄모토는 계속 집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나 미대에 간다. 그리고 이번에도 괴한을 만난다. 이때 후지노가 쿄모토를 구한다. 우연히 흉기를 든 남자를 목격했고 뒤쫓아가 남성을 제압, 쿄모토를 죽지 않게 한다. 쿄모토는 자신을 구한 후지노가 학창시절 네 컷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라는 걸 알고 기뻐하고, 집에 돌아온 뒤 마치 후지노가 그렸던 것과 비슷한 네 컷 만화를 그린다. 그리고나서 『룩 백』은 마치 멀티버스라도 있다는 듯 그 만화를 쿄모토를 잃고 실의에 빠진 후지노에게 건넨다. 후지노의 만화가 쿄모토에게 우연찮게 전달됐던 것처럼. 그 만화 내용은 쿄모토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 뒤 의기양양하지만 등에 거대한 도끼가 꽂혀 있는 후지노의 모습이다.
이상한 건 쿄모토가 그린 만화를 후지노가 보게 된다는 것이다. 쿄모토의 네 컷 만화는 실제로 그려진 게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후지노는 그걸 볼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룩 백’은 후지노가 쿄모토의 만화를 보게 한다. 그리고 이 만화로 후지노의 결심을 끌어낸다. 그렇다면 이건 후지모토 작가의 개입이라고 봐야 한다. 작가가 쿄모토의 만화로 가장한 메시지를 후지노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건 『룩 백』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쿄모토를 구하려다가 큰 상처를 입은 네 자신을 봐라.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네가 쿄모토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것도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너도 다르지 않다. 너 역시도 죽음과 함께 살고 있다.‘ 이제 후지노는 쿄모토의 선택과 그의 죽음에 깃든 의미를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성장한다는 것,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라고.
『룩 백』은 후지노의 뒷모습을 담는다. 뒷모습이 그려지는 순간은 그때마다 후지노가 어떤 선택을 내린 뒤 앞으로 전진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을 때였다. 쿄모토보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포기했던 만화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진짜 만화가가 되기 위해, 첫 작품 연재를 위해. 그 뒷모습에는 안간힘이 있다. 그 뒷모습에는 오기가 있으면서도 피곤이 있다. 그 뒷모습은 종종 외로워 보여서 애처롭다. 방구석에 쳐박혀 있든 집 밖으로 나오든 어차피 죽는다. 이것이 이 『룩 백』말하는 성장이다. 『룩 백』은 성장물이지만, 성장하는 과정을 말하기보다 성장이 무엇인지 그린다. 이제 후지노는 쿄모토라는 세계에서 나와 다시 출발한다. 역시나 뒷모습이다. 그 뒷모습에는 안감힘과 오기와 피곤과 외로움이 있다. 그렇게 또 후지노는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애처롭지만 어쩔 수 없다. (2023/4/30)
손정빈 | 『뉴시스』 영화 담당 기자. 영화 매거진 『무비고어』 편집장. 2013년부터 『뉴시스』에서 일했다. 사회부·정치부·산업부를 거쳤고, 영화를 가장 오래 맡았다. 2021년 『무비고어』를 창간했고 2022년 『손정빈의 환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