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들 살만과 나무의 미래

주뱅

내가 지들 살만을 처음 만난 것은 한참 출판학교를 다니고 있던 여름이었는데, 에어컨이 고장 난 교실에 앉아 동료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무언가를 열중해서 배우고 있었다. 열중의 깊이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열중의 방향에 대해서는 종종 고민했고, 흐르는 땀이 더위 때문인지 열중의 징표인지 알 수 없어 때로 혼란스러웠다. 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책이 이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 사이에서 조금씩 책을 배웠다. 책에서 배우다가 책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 강의실에 앉아 녹은 초콜릿을 먹었다. 

높으신 분들이 회의하러 오는 날에는 건물 주차장에 외제차가 가득 찼다. 그들의 작은 회의실은 편집자반 바로 위층에 있었다. 더위로 얼굴이 붉어진 동료들로 가득 찬 강의실 너머 계단 밖으로 적막을 깨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더운 마음에 심통이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들은 살 만하니까……”라고 중얼거렸고, 웃음소리는 이내 멈추었다. 회의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원탁에 사람들이 앉아서 출판의 미래에 고민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지났고 동료들은 다시 연필 공장에서 흑연을 다듬는 사람의 뒤통수처럼 열중했다. 그때 누군가가 강의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말하자 흰 터번을 칭칭 감은 매부리코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지들 살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이름은 ‘지들 빈 살만’인데, 그가 왜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은 대추야자를 들고 출판학교의 문을 두드린 그 남자를 어색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를 내가 불러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래 당황했다. 지들 살만은 이 정도 더위는 익숙하다는 듯이 강의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극장처럼 층층이 올라서 있는 강의실에 앉은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이상하게 편안했고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를 옅게 채우고 있는 냉소와 흑연처럼 단단한 심지를 동시에 잊고 말았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책 한 권을 줄 수 없냐고 청했다. 모두가 우물쭈물하자 그는 강의실 옆을 채운 서가에 다가서더니,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백은선 시인의 시집 『도움받는 기분』이었다. 

지들 살만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한 권을 뽑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풍습이 있다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열심히 따라한 사람에게는 고급 대추야자를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살만은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치더니 한 구절을 골라 즉흥적인 음률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무야 나무야 서서 자는 나무야 (……)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1백은선, 「코카·콜라」,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우리는 홀린 듯 그 아름다운 선율을 반복해서 따라 불렀다. 살만이 선창하면 우리들이 합창했다. 분위기는 계속 고조되었다. 살만의 터번이 펄럭거렸다. 때 아닌 여름의 합창이 언제 끝난지도 모르고 불현듯 멈췄을 때, 지들 살만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각자의 책상 앞에 대추야자가 한 개씩 있었다. 

살만은 그때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는 잠시 모여 토의했다. 

1.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많은 경우 편집자들은 나무에게 남모를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이 노래는 나무에 대한 죄책감의 발로다. 

2. 책은 종이로 만든다. 나무가 누워서 자야 하는 이유는, 서점 매대에 책이 ‘누워서’ 광고하듯 잘 보여야 함을 의미한다.

3. 전자책은 책으로 만든다. 이제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 나무는 이제 누워서 쉬어도 된다. 

4. 아니다, 나무는 인간들이 종종 불을 켜 놓고 잠에 드는 것처럼 누워서 자는 것을 잊었을 뿐이다.

(……)

그 후로 나는 지들 빈 살만을 우연찮은 기회에 몇 번 더 마주쳤지만 그때 그 노래의 의미를 묻지는 못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지들 살만은 늘 대추야자를 쥐여 주고 사라졌다. 나는 단지 그 노래가 출판의 미래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할 뿐이다. 하필 출판학교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계속 서서 자거나, 누워서 잘 것이다. 누워서 자는 나무는 죽은 나무다. 다르게 말하면, 종이가 될 수도 있는 나무다. 

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누울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텍스트는 걱정할 것이 없다. 텍스트는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파종하는 덩굴이다. 그러나 책에게는 누울 자리가 필요하다.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는 숲의 시간은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무들은 모두 베일 운명인지도. 그러나 죽은 나무들은 종이가 된다. 누울 자리를 찾는다. 누워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심해야 할 것이다. 오로지 책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책으로 남을 것이다. 누워서 자는 책,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이제 새로 도래할 책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나무야 나무야 다리 아프지 (……)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2앞의 책.

새로운 나무가 파종되는 곳이 자연이다.

주뱅
여전히 간장계란밥을 좋아한다. 낮에 편집하고 밤에 쓴다.
https://blog.naver.com/mondergreen

  • 1
    백은선, 「코카·콜라」,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 2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