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미투, 나도 방관자였다

고민호 edited by 정윤

‘빠른 봉합’으로 상처를 숨기는 천주교계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네가 이해를 해 달라”

자신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성직자의 추악한 모습에 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 미투(MeToo)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2월, KBS는 한만삼 신부의 성폭력 사건을 보도했다. 한 신부는 2011년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함께 선교 봉사활동을 하던 여신자 김민경 씨를 성추행하고 성폭행까지 시도했다. 남수단은 고(故) 이태석 신부의 선교지로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곳이다. 한 신부 역시 이 영화에 등장한다.

한 신부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며 식당 문을 잠그고 김 씨를 강간하려 시도했다. 김 씨가 있는 방의 문을 따고 침입하기도 했다. 김 씨는 성폭력 사건을 일기에 기록했다. ‘눈과 손목에 멍이 들었다. 주님, 저를 구하소서.’ 절박한 문장 속에는 괴로움과 체념이 담겼다. 주변 신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 씨를 구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슴에 묻었던 아픈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6년 만에 용기를 낸 김 씨의 미투 고발로 천주교계는 발칵 뒤집혔다. 종교계에서 많은 사건이 드러나는 동안 그나마 잠잠했던 천주교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떠들썩하던 교계 바깥과는 달리, 막상 천주교 내부는 잠잠하다 못해 고요했다.

한만삼 신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주임신부로 있던 수원의 한 성당에서는 미사가 취소되고 출입금지령이 내려졌다. 신자들은 며칠 정도만 보도거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이슈가 사라져 잠잠해질 것’이라는 단체 문자를 받았다. 성전 내부에서의 문제제기와 토론은 없었다. 절대적으로 거룩한 신부에게 감히 ‘성’문제를 제기할 간 큰 신자를 상상하긴 어렵다. 천주교 신자인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천주교가 성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렇듯 조용하고 폐쇄적이다. 한만삼 신부 사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도가 나간 지 이틀 만에 수원교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3일 후에는 한국 천주교의 최고 의결기구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공개 사과했다. 사과 이후, 외부와의 모든 소통 창구는 막혔다. 홈페이지는 폐쇄되었고, 언론 취재 역시 금지됐다. ‘빠른 사과’는 ‘빠른 봉합’을 의미했다. 당사자인 한 신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을 것이다. 정작 김 씨는 누구로부터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들을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들

사제로부터 성범죄를 당하면 피해자는 무기력해진다. 가장 믿을 수 있어야 할 사람이 가장 믿을 수 없는 짓을 벌였을 때, 피해자는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에 빠진다. 그런 점에서 사제의 성범죄는 친족 성범죄와 유사하다. 다만 사제의 성범죄에는 ‘신앙’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피해자들은 신앙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신앙 공동체에는 그동안 하느님과 사제를 믿었던 피해자의 가족들, 친구들, 그동안 성당에 봉사했던 수많은 이들이 속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호소하면 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에 빠진다. 김민경 씨 역시 그동안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어렵게 일궈 왔던 해외 선교지의 사역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우려해 피해를 공개적으로 호소하기 꺼려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안에 일을 외부로 들고나가 전적으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경찰 신고나 고소 등은 피해자 입장에서 더욱 부담스러울 수 있다.

결국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나가서 홀로 상처를 떠안거나, 각 성당의 상위기관인 교구로 투서를 보내 사제의 성범죄를 고발하는 것만이, 현재로선 피해자들이 찾을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다. 고발이 들어오면 교구에서는 징계위원회를 통해 자체조사를 진행한다. 범죄사실이 확인된 사제는 교회법에 따라 휴직, 정직, 면직 등의 처분을 받는다. 해당 사제를 성당에서 쫓아내는 ‘땜질식 처방’이 성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관례로 자리 잡았다. 아주 가끔 신자들은 사제의 뜬금없는 인사이동을 목격하곤 한다. 그 사제에게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넘겨짚을 뿐, 신자들은 그 이상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만삼 신부가 어떤 징계를 받았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구조적인 폐쇄성, 결코 쉽지 않는 고발 과정, 교구의 절대적 권위, 비밀리에 은폐가 가능한 공동체 구조 등은 혹시라도 곳곳에 있을 사제 성범죄 피해자들을 더욱 어둠 속에 숨도록 만든다. 2002년에 미국 보스턴 지역에서 약 90명의 사제가 아동 성추행에 연루되었던 사건을 폭로한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년)에 등장하는 <보스턴 글로브> 같은 언론도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제의 빛과 그늘, 인간성

그렇다고 실제 한국의 수많은 사제들이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30년 넘게 천주교를 믿으며 좋은 신부님들을 수없이 만났다.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훌륭한 스승이 많았다.

사제가 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신념과 깨달음으로 신학교에서 7년의 혹독한 교육과정을 거친다. 세속의 삶과 구별되어 인생을 오롯이 신앙에 바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인 성욕을 자제하고 독신을 택하는 것은 사제로서의 삶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마태오 복음> 19장 12절)이라는 성경문구는 사제의 독신주의를 설명한다.

동시에 사제도 사람이다. 10년 정도 성당 청년회에서 간부를 꾸준히 맡으면서 신부와 더욱 가까워질 기회가 있었다. 사제로서의 고민과 고충을 들으며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사제는 개신교 목사와 달리 술을 마실 수 있다. 천주교는 향락주의를 경계하지만, 인간의 먹거리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도 한다. 각 종교의 신자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주량이 가장 강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필자의 신앙생활도 늘 주(酒)님과 함께였다.

신부님과 조금 더 친해지면서 저녁 약속을 자주 잡곤 했다. 역시 ‘주거니 받거니’다. 자리에 남녀를 가리진 않았다. 신부님이 아무리 술에 취한 채 여자 신자와 얘기를 나누어도 혹시라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하지만 사제도 사람인 것을, 사람인 만큼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얻게 되었다.

청년부 회식, 신부님의 옆자리

2010년 겨울의 일이다. 일요일 오후 6시, 변함없이 청년미사가 열렸다. 성당의 청년회가 봉사를 맡는 미사를 청년미사라고 한다. 미사가 끝나면 청년회가 모여 저녁식사를 하곤 한다. 저녁식사에는 신부님이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명목상 저녁식사지만 술이 곁들여진 회식이다.

청년회장이었던 나는 메뉴선정에 늘 골몰했다. 신부님과 청년들이 원하는 메뉴를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동네에 있는 고깃집을 예약하고 10명 정도가 함께했다. 남자 6명에 여자 4명. 음식점 자리에 앉자 신부님이 5분 후쯤 도착했다. 신부님 옆에는 청년을 담당하는 청소년분과장이 있었다. 자리를 안내했다. 청소년분과장은 자리에 앉지 않고 한참을 서성였다. 그러다 조용히 “잠시 밖으로 나와 보라”고 귀띔했다.

청소년분과장은 청년회를 담당하는 분과장이다. 성당은 신자들이 운영하는 ‘사목회’라는 기구를 두고 각각의 분과마다 분과장을 둔다. 성당의 살림이나 조직 운영, 봉사활동과 관련된 의사결정은 이곳에서 한다. 청년회장으로서 청소년분과장을 잘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하지만 당시 분과장은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회에서 학교 선생님이라는 40대 중반의 그는, 마치 교무실에 있는 교무주임처럼 청년을 대했다.

음식점 밖으로 대뜸 나와서 그는 “자리 배치 좀 잘해 봐”라고 운을 띄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신부님 옆에 왜 남자밖에 없냐”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요지는 신부님 옆에 남자 청년들밖에 없고, 그 이유로 신부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부님 옆에 여자를 앉혀야 분위기가 산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 회식 때 지켜보겠다”고도 덧붙였다.

속으로 ‘시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쌍욕이 나왔다. 자리배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신부님 옆에 누가 앉았는지, 여자 청년들은 어디 앉았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생각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신부님 옆에 여자 청년을 앉혀야 하는가.’

신부님의 지시 혹은 청소년분과장의 잘못된 충성심,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당시에는 충성심에 무게를 실었다. 그는 ‘심기(心氣) 경호’의 달인이었다. 권력자의 심기까지 편안하게 하는데 탁월했다. 신부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때면 그는 늘 그곳에 숨겨진 신부님의 의중을 설명했다. “저녁 때 신부님한테 메뉴를 안 물었잖아.”, “신부님이 어제 보자 했는데 혹시 연락 안 받았니.”, “신부님은 말이지 이런 거 싫어해.” 등등. 가끔 그의 후속 설명을 제발 멈추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부님의 의중이 무엇이든, 굳이 알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아주 이상한 것을 따지는 이 분과장과의 대화를 빨리 마치고 싶었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 소리가 지금 이 대화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자리로 돌아와 한참 신부님의 표정을 살폈다. 만약에 분과장이 언급한 자리배치가 신부님의 지시였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라면 그 지시를 따랐을까. 어떻게 거절했을까. 그냥 같이 어울려 먹자는 건데,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그래도 신부님인데.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였다.

“신부님이 B를 성추행 했어”

한 달 남짓 지났을 때다. 함께 성당을 다니는 A형이 저녁을 먹자고 불렀다. 동네에서 자주 가는 일본식 주점. 자리에 가 보니 4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다들 청년회 간부를 했던 형, 누나들이었다. 심각한 표정들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리에 털썩 앉아 “왜 이렇게 심각하세요”라고 물었다. 나를 초대한 A형이 묵묵히 술잔을 따라 준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B누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어떻게 할 거야?”, “조치는 취해야 하지 않겠어?” B누나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하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A형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 놓는다. “사실 신부님이 B한테 성추행을 했어. 손잡고 싶다, 뽀뽀하고 싶다. 그것도 우리 회식 끝날 때 뒤에서 둘이 걸어갈 때 몰래 그 얘기를 했었고. 손도 잡으려 했고, 실제로 잡았고. 문자도 그렇고, 증거 다 있어. 원래 더 퍼져 나가지 않게 하려고 몇 명만 알았는데 너도 회장이니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너 생각은 어때?”

“진짜?”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게 과연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신부님이? 신부님이 어떻게 신자한테, 그것도 대놓고? 그동안 신부님을 따라 기도한 우리는 무엇이 되지? 그런 다른 마음을 품고서 어떻게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지?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B누나가 침착하게 이어 갔다. “예전부터 사실 조금씩 그러긴 했는데 최근에 더 심해진 것 같아. 아무래도 한번 하다 보니까, 점점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몇몇 아는 사람에게만 전하는 거야.”

머릿속이 백지장이 됐다. 신부님한테 성추행을 당했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그런 경우가 있긴 있었나? 뉴스나 주변에서도 전혀 못 봤던 것 같은데. 회장이랑 직책이 새삼 창피해졌다. 이런 사건이 나도 어떻게 해결할지 하나도 모르는데.

묵묵히 듣고 있던 C형이 “그러면 B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라고 물었다. B누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나도 신고를 생각 안 했던 것은 아니야. 교구에 올릴 수 있대. 그런데 그 신고 내역이 신부님한테 들어갈까 봐 두려워. 혹시나 신고를 하더라도, 성당에 어머니, 아버지 다 다니셔. 충격이 아마 크실거야. 그 모습은 도저히 못 보겠어.” 누나가 어느새 울고 있었다.

누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간부활동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자리를 그만뒀다. 한동안 미사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게 이 이유였구나,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뇌가 느껴졌다.

“당장 신고해 이건, 도저히 못 봐”, “피해자가 우선이야, 피해자 의견을 존중하자” 사건 해결을 둘러싸고 술자리 내내 격론이 펼쳐졌다. 이 순간, 신부님 옆자리에 절대 여자 청년은 앉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동시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를 보며 얼마나, 어디까지 그의 말과 행동을 믿어야 할 것인가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우리는

연이어 사건이 터진 뒤에도 성당은 잠잠했다. 아무런 문제도 제기되지 않고 시간은 흘러갔다. 여전히 신부님은 미사를 집전했으며 B누나는 성당을 거의 나오지 않았다. 회식자리가 있을 때도 “저녁은 집에서 먹겠다”며 먼저 집으로 향했다. 떠나는 이는 B누나였다. 사제는 그냥 그대로 제자리를 지켰다.

청년회장을 계속하며 저녁시간 즈음 사제관으로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B누나 사건을 듣고 나서는, 다른 여자 청년이 가느니 내가 불려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도 어김없이 사제관에 불려갔다. 사제의 자택인 ‘사제관’은 일종의 ‘성’이다. 사제가 생활하는 공간이기에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한편 사제관에는 술이 많기로 유명하다. 교리상 음주가 허용되는 만큼, 사제에게 술 선물이 들어오는 일이 잦다. 사제관 책장을 열면 ‘양주 콜렉션’이 놓여 있는 것을 꽤 자주 봤다. 그날도 사제관 테이블에는 술상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오히려 혼자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이 한 잔, 두 잔 돌고 신부님이 “별일 없어?”, “바쁘지 않아?” 등의 질문을 한다. “청년회 활동이 워낙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한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오가며 술자리는 점점 달아오른다.

그때 신부님이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 건너편의 상대방은 누군지 알 수 없다. 신부님은 “어, 이쪽으로 와. 먹을 것도 많고.”, “체했다고? 그래서 못온다고?”, “그럼 내가 따 줄게, 걱정 말고 와. 시간 얼마 줘, 5분? 10분? 알아서 해.” 뚝 끊은 전화. 반대로, 이와 즉시, 나의 핸드폰에 찍힌 문자. “너 혹시 신부님이랑 같이 있니?” 성당에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간호사 C누나였다.

C누나는 몇 번 사제관을 와 본 눈치였다. 사제관의 분위기를 물었다. 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누나를 너무 심하게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자를 넘어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부님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이미 혀는 꼬여 있다. “너 어디니, 아까 온다 했잖아.”, “체했다고? 내가 따 준다고, 금방 따. 빨리 와. 셋 샌다.”, “아무 것도 안 해. 그냥 술만 먹어, 와서.”, “술, 평소엔 잘 먹더니 왜 그래?” 옆에 있던 나는 제발 누나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신부님은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안 오면 알아서 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곤 술기운이 가득 찼는지 비틀비틀 방에 있는 침대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른 성당으로 빨리 가길 기도하는 수밖에.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어쩌다 우리는 신부님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게 됐을까. 그리고, 신앙인이라는 나 역시도, 방관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