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 전사 2: 사랑의 불시착

책 만드는 희 edited by 김윤우

‘딱 1년만 일하고 뜨는 거다. 천만 원만 모으면 한국을 뜨는 거야.’

있는 힘껏 미소를 쥐어짜며 면접관들을 바라보았다. 붙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모을 수 있어.

졸업반이 되었고, 무언가 되어야만 했다. 흔한 토익 점수도 없었고(시험을 본 적 없으므로), 스펙 쌓기는 고사하고 전공 공부도 제대로 한 적 없었다. 그럼 4년간 무얼 했느냐 하면, 영화를 봤다. 영화 촬영장에 있었다, 영화를 공부했다, 크고 작은 영화제에 다녔다. 영화, 영화, 영화, 매일이 영화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내가 취해 보냈다. 때문에 무언가 되어야 한다면 달리 생각할 게 없었다. 영화밖에는.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껏 생각해 낸 방법은 학위를 따는 것. (영어도 못하면서) 호주에 있는 필름스쿨의 촬영 전공 1년 과정을 목표로 결심하고는 계획을 세웠다. 이어진 생각의 흐름은 단순했다. 떠나려면 돈이 필요하다 → 알바로는 큰돈 못 모으니, 취직하자 → 국문과이니 출판사가 유리하겠지 → 출판사에 취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던 중 신문에서 우연히 광고를 발견했다. “편집자 입문 교육과정 모집.”

3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한 출판사의 영어단행본 팀에 지원했다. 면접 날, ‘편집자’가 ‘영화 편집기사’와 다르다는 걸 안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으면서도 태연하게 이 회사의 미래를 이끌 편집자가 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책을 만들 수 있고(음?), 토익 공부도 안 해봤기 때문에 토익책도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뭐라고?) 논리를 펼치며 속으로 은밀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죄송합니다만, 저는 떠날 겁니다. 꿈을 찾아 훨훨 날아갈 거예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저를 뽑아 주세요.

운 좋게 처음 지원한 회사에 바로 입사했다. 1년을 무사히 보냈고 악착같이 천만 원도 모았다. 그래서 훨훨 떠났느냐고? 예상했겠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오래오래 출판사에서 책 만들며 살았다는, 어쩌면 시작부터 이미 정해진 것 같은 결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 만든 지 몇 개월쯤 지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영화가 아니어도 되겠다.’ 영화판에 있고 싶어 영화를 맴돌았던 건 순전히 촬영장에서 밤새우는 게 좋아서였다(세상에!). 며칠씩 집에 가지 않고 몸에서 쉰내가 나도록 집중해서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게, 떠올리기만 해도 두근거릴 만큼 좋았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일해 보니 ‘함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도 좋았다. 춥고 더운 촬영장이 아닌 따뜻하고 시원한 사무실에서 할 수 있으니, 더 좋았다. 많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것도. 무엇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상대에게 매달리는 연애만 하다가, 내가 먼저 대차게 차 버릴 수 있는 연애를 하는 듯했다.

사랑의 권력을 쥐었다는 착각으로 편집자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책 만드는 희 | 2003년 출판사 입사, 현 16년 차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