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는 편집하지 않는다―퇴사일지

지다율

8:44~9:23
들끓는 가래

“니가 L이랑 사귀자고 했다며?”

이게 한 회사의 대표가 일개 사원에게 할 말인가. 이게 정녕 이순을 훌쩍 넘긴 남자가 이립을 갓 넘긴 남자에게 할 소리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인지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침부터 불려와 온갖 이상한 소리를 꾸역꾸역 참았다. 어깨 힘 빼라, 내가 널 알아 줘야 하냐, 너 요즘 얼굴이 너무 좋아져서 싫다, 멋 부리지 마라, 니가 책을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감히 작가들 무시하고 잘난 척을 하냐, 내가 그동안 많이 참았는데 요즘엔 니가 너무 불편하다 등등. 뭐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어쨌든 난 이 세 번째 직장에서만큼은 어떻게든 버티고 버틸 거다. 그런 생각으로 잘못했다고 계속 중얼거리며, 어항 속 붕어들을 힐끔거렸다. 희귀종이라고, 엄청 비싼 거라고 회의시간에도 말할 정도로 저 사람이 아끼는 붕어들이었다. 닮았다. 이마가 툭툭툭 튀어나온 게 아주 닮았다. 그 이마를 툭툭툭 원투스트레이…….

“회사를 사유화하려는 거냐? 그렇게 니 맘대로 하려면 니가 사장 해.”

한 방 맞았다. 그것도 큰 걸로. 오늘은 분명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어항에서 눈을 돌려 붕어, 아니 대표를 쳐다봤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카악, 그가 가래를 돋우어 휴지로 입을 훔쳤다. 미처 포획되지 못한 가래가 그의 배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워낙 골초인지라 자주 해본 동작일 텐데도, 그는 종종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자각하지 못한 채 한참 뒤에야 말라 엉겨 붙은 가래를 떼어 내곤 했다.

“내가 사람들하고 몰려다니지 말랬지? 도대체 너희끼리 무슨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희희낙락이야. 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옆에 있는 동기랑 무슨 말을 했지? 그때 후배랑 자기 얘기하는 걸 들었나? 아니, 저 사람은 정말 내가 그들과 ‘무슨’ 얘기를 한 건지 궁금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보기 싫었던 걸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는데 그가 대뜸 묻는다.

“니가 L이랑 사귀자고 했다며?”

L? 너무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라 잠깐 생각해야 했다. 겨우 떠올렸다. 그는 진작 퇴사한 선배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생각보다 내 목소리가 크구나.

“제가 사귀자고 했다고요? 누가 그럽니까?”

“걔가.”

이 미친. 욕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L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했을까, 란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L을 믿어서가 아니라 L과 나 사이의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 있는 저 남자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 풀스윙으로.

나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L이 그랬다고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그럼 내가 없는 말을 맹글어서 하냐?!”

그의 호통에 아까처럼 움츠러들지가 않는다. 나도 저 사람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인정해야 합니까?!”

그는 이제 내용이 아니라 내 태도를 걸고넘어지겠지. 반응은 뻔하다.

“내가 니 친구냐?! 어? 내가 니 친구야?!”

잠시 정적이 흐른다. 어차피 끝났다. 혹은 저 인간의 폭언과 만행을 좀 더 견뎌야 하거나. 어쩌면 내 반응도 애초에 예정되어 있었다.

“제가 그런 말을 더 들어야 합니까?”

그는 씩씩대며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이제 당신 허락은 필요 없으니까. 나는 일어서며 말한다.

“나가 보겠습니다.”

문을 나설 때까지 여전히 말이 없다. 저 입속에서는 또 누렇고 진한 가래가 끓고 있을 것이다.

10:57~12:03
이직은 아직

부편집장과 편집장을 거칠 필요도 없이 총무팀장에게 가서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안타깝지만 예상은 했다는 기색이다. 그러시겠지. 오늘 아침 임원회의 때도 내 얘기를 했을 테니까.

사실 임원들의 조리돌림은 몇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언젠가 편집장은 “눈치가 그렇게 없어? 왜 찍히지 못해 안달이야.”라며 핀잔을 주었다. 전체 회의가 아니면 마주칠 일도 없는, 말 섞을 일은 더더욱 없는 영업팀장도 지나가듯 말했다. “K씨 때문에 매일 아침 임원회의가 불편하잖아. 신경 좀 쓰지.”

하루는 부편집장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그가 앉은 책상 위엔 편집일지가 놓여 있다.

“K씨가 올해 무슨 책들을 맡았지?”

그가 일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묻는다. 지금 당신이 일지 보고 있잖아, 라는 생각을 한켠에 치우고 그동안 편집했던 책을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긴다.

“『양장피의 침묵』이랑 『조이 드 비브르』, 『나민 살라실』, 그리고 『붕어 밥 주는 마음』, 『명문대사회학』, 음, 또 『계속 기다리면 너무 힘들다』…….”

“그게 다 K씨가 한 건가?”

그가 또 말을 끊는다. 저렇게 말을 끊을 거면서 왜 또 끊임없이 말을 시키는지 모르겠다. 저 사람은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 그냥 자기가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오직 청자뿐이다.

내가 답이 없자 부편집장은 다시 묻는다. 그 정도 이해력도 없냐는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

“그 책들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K씨가 편집한 책이냐고.”

그딴 걸 지금, 갑자기 불러서, 도대체 왜 묻는 거야, 라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나는 답한다.
“아뇨. 『양장피의 침묵』은 전임자 M씨가 갑자기 퇴사해서 제가 삼교 때 받았고, 『명문대사회학』은 워낙 두꺼운 책이라 후배 둘이랑 예닐곱 챕터씩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아, 인턴만 하고 나간 친구도 초교 때는 참여했…….”

“K씨.”

참 잘 끊어.

“네?”

“그런 거 하지 마.”

“……그런 거라뇨?”

“묻지도 않은 것까지 말하지 말라고. 안 궁금하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 비즈니스식 문법은 중요한 것부터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클라이언트는 결과를 중요시해. 보이는 게 다라고. 내가 전 직장에 있을 때 말이야. ……”

왜 안 나오나 했다. 틈만 나면 하는, 아니 어떻게든 틈을 내서라도 해야만 하는 그 화려한 ‘전 직장’ 이야기들. 그는 대기업 출신이다.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근대그룹 계열사와 구한금융회사 출신이라고 한다. 한국이 낳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과 국내 금융계 1위 회사에서 그는 배운 게 참 많은가 보다. ‘비즈니스식 문법’은 물론 ‘대인 화술론’, ‘표정 관리법’, ‘타임 매니지먼트’ 등등. 그는 참 모르는 게 없어서 시간 나면 편집자들을 불러 가르친다. 연차 낮은 편집자는 물론 자기보다 훨씬 오래 일한 편집자에게까지 편집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대기업이 대단하긴 대단한 것 같다. 대기업은 돈도 많이 주고 교원 자격증까지 주나 보지.

“그러니까 K씨가 딱히 일을 못하는 건 아냐.”

전 직장과 전전 직장을 거쳐 명문대 국문과 재학 시절까지. 일지 한 장에 자기자랑 하나씩을 곁들이던 그가 마침내 일지를 소리 나게 덮으며 말했다. 드디어 본론인 건가. 아니, 저 사람에게 본론은 자기자랑이니까 어쩌면 이제 결론인지도. 제발 빨리 끝내라. 나 배열표 써야 돼.

“그렇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물론.”

예, 예.

“그런데 대표님이 K씨를 왜 싫어하는지 알아?”

얼굴이 좋아져서?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부편집장이 예의 그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당신이 싫은 거야. 웃는 거, 말하는 거, 움직이는 거, 전부 다.”

어쩌라고.

“일전에 시집 편집한 적 있잖아. 『너무 기다리면 계속 힘들다』였나? 근데 작업 도중에 대표님이 한 번 불러서 시집 어떠냐고 물었더니 엄청 씨니컬하게 대답했다며?”

“『계속 기다리면 너무 힘들다』입니다. 그리고 ‘씨니컬’이 아니라 담당 편집자로서 ‘비판적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명문대 국문과 졸업, 대기업 출신 부편집장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러니까 K씨가 왜 ‘비판적 의견’을 내냐고? 그 시인, 대표님 대학 후배인 거 몰라? 그냥 ‘좋다’고 하면 되지. 왜 잘난 척을 해?”

나는 깊은 깨달음에 맥이 풀렸다. 아, 그렇구나. 편집자는 대표님 대학 후배님의 시집을 그냥 ‘좋다’고 하며 편집하면 되는구나. 그 책 어떠냐는 질문이 정말 내 의견을 묻는 게 아니었구나. 그제야 편집장이 원고를 맡기며 “시집이니까 하루면 끝나지?” 말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시의 수준 따위야 알 바 없고, 다른 글에 비해 확실히 글자 수가 적은 시집 편집하는 게 뭐 그리 수고로운 일이냐, 괜히 시간 잡아먹지 말고 얼른 끝내라는 그 깊은 뜻을 이제야 깨달았다. 평소 버릇처럼 내뱉던 “기계처럼 일하지 말고 생각하면서 일해.”라는 말씀도 비로소 이해가 된다. 기계처럼 일만 하지 말고 대표님 생각하면서 일해.

“그리고 작년 대표님 생신에 수족관 갔을 때도 그러면 안 되지.”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작년 대표님 생신엔 내가 또 감히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대표님이 물고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K씨도 잘 알잖아. 오죽하면 직접 수족관까지 운영하시겠어. 그 사랑을 우리 출판사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으셔서 1년에 딱 두 번, ‘물고기의 날’이랑 당신 생신에 다 같이 가서 물고기도 구경하고 식사도 함께하는 거잖아.”

네, 그 사랑 참 잘 알죠. 그 비싼 물고기들 구하시느라 직원들 월급은 몇 년째 그대로잖아요. 덕분에 ‘물고기의 날’이란 것도 알게 되었어요. 덴마크 어느 작은 어촌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만든 날을 이역만리 어느 반도의 출판사 직원이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요. 그것도 평일이 아니라 그날이 있는 주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남직원들은 거대한 어항 물을 갈고 여직원들은 드넓은 바닥이랑 벽을 닦으며 기념한다는 사실을요. 매일 9~10시간씩 앉아서 일만 하느라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그렇게 1년에 딱 두 번이라도 몸 쓸 기회를 주셔서 대표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때, 대표님이 정말 어렵게 구하신 갸라도스 설명하시는데, K씨 뭐 했어? 어? 혼자 다른 어항 보면서 킥킥대고 있었지? 어? 대표님이 얼마나 기분 나쁘셨겠어? 어? 어?”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거 하지 마. 웃지도 말고, 비판도 하지 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납득되지도 않았으면서, 껍데기뿐인 사과를 연발했다.

“K씨, 이따 점심이나 같이합시다.”

자리에 돌아와 멀뚱히 앉아 있는데 부편집장이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예?”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점심 같이 먹자구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대충 알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아까 온 문자를 또 한 번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얼마 전에 면접 본 회사가 보낸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늦었지만 대표님께서 꼭 전달해 달라 하셔서 연락드려요. K님과 인연이 안 되었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K님께 다시 연락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인터뷰였다고 하십니다. 이력서는 저희 측에서 보관하고 있겠으니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H출판에 인터뷰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 많으셨으면 좋겠구요. 다음이겠지만 좋은 인연으로 만나길 기대하겠습니다.
H출판 드림.

13:37~17:02

전 직장, 비즈니스, 전전 직장, 비즈니스, 명문대, 아는 사람, 아는 사람 얘기로 정말 귀 부른 점심시간이었다. “그런 거 하지 마, 안 궁금하니까.”라는 말이 혀끝까지 당도했지만 윗니와 아랫니를 꾹 다물어 간신히 참았다. 悒悒 悒悒 悒悒 悒悒(우리 제발 그만 보자).

자리에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저자를 직접 만날 일도 별로 없었고, 밖에서 다른 사람과 격식을 갖춰 만날 일은 더더욱 없었으므로, 처음 받았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명함통을 제일 먼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동안 담당했던 책들도 모조리 종이 수거함에 쏟아붓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진 못하고 책장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다. 일하면서 참고하려고 산 책들은 빠짐없이 챙겼다. 『닫힌책들의 편집 매뉴얼』, 『편집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왜 책을 만드나?』……. 기왕 시작한 거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2년도 채 못 버텼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컴퓨터 폴더를 정리했다. 이미 출간된 책들과 관련한 폴더는 지우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들의 진행상황과 참고사항은 인계를 위해 꼼꼼히 정리해 파일을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 일목요연한 사람이었나. 나도 모르게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었다. 남부끄럽게, 참. 어릴 때부터 산만하고 집중력 없던 내가 일하면서 제법 변한 것 같다. “너 이렇게 정리하면 일 오래 못해.”라는 사수 선배의 예언이 결국 들어맞긴 했지만, 입사 초기 때 작업한 폴더와 최근 폴더를 비교하면 확실히 깔끔해졌다. 조금쯤 회사에 감사해야 하려나.

감사라니.

나는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내가 받은 처우를 떠올렸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인턴’인지 ‘수습’인지 “서로 알아보는 시간”이라는 이유로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근로계약서는 쓰지 않았지만 아무튼 정식사원이 된 뒤로는 한 달에 15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았고, 이듬해부터는 매달 20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았다. 처참했다. 나는 월급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기록을 경신할 수 없는 운동선수처럼, 매달 제때 배달되는 성적표에 박힌 스코어는 늘 그대로였다. 죄송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나는 내내 면목이 없었다.

내가 출판사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씁쓸함을 애써 감추는 듯했다. “잘은 모르지만 출판계가 불황이라는데……. (잠시 호흡 정비) 그래도 200은 주지?” 대학원까지 가서 남들보다 공부를 많이 한 아들이 당연히 남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아버지도 당연히 생각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30년 경력의 사업가가 모를 리 없고, 아들이 그만큼 대단치 않은 인물임을 30년 경력의 부모가 또 모를 리 없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금 또 다시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온 자식을 또 한 번 믿어 보자고 각오하는 데, 다음엔 더 노력해서 잘 해보라고 격려하는 데, 시간이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내 침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빤히 알면서, 그렇게 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일은 더럽게 재미없었다. 입사를 준비하며 읽었던 출판사와 편집자에 대한 책들은 모두 소용없었다. 이곳은 사상의 흐름과 지식의 유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대표 지인의 시시껄렁한 에세이나 역사소설, 그리고 어쩌다 기업 총수의 대필 자서전을 공장처럼 찍어낼 뿐이었다.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책들을 위해 편집자들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완성된 원고에 우리가 개입할 여지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보기 좋게 레이아웃을 잡고, 비문을 고치고, 오탈자를 꼼꼼히 확인만 하면 되었다.

이 일이 간단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교정교열은 편집의 기본이고, 기본은 항상 중요하니까. 그러나 여기 있다가는 그 기본만 평생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10년 뒤에도 하고, 20년 뒤에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음, 세상의 거의 모든 전문가가 그렇게 무수한 반복으로 성취된다는 당신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내 목표가 ‘교정교열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도 당신은 인정해야 한다. 특정 직업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오히려 『네 문장도 이렇게 이상합니다!』를 읽고 나서는 문장에 대한 교정교열자의 치열하고 진지한 태도에 감탄하며 반성도 했다. 하지만 역시, 치열한 교정교열만으로는 훌륭한 편집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쓰레기 같은 책을 내는 곳에서는 더더욱.

재미도 의미도 없는 일을 2년 가까이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많이 부렸다. 찌푸린 인상은 내 얼굴의 디폴트였고, 입만 열면 회사와 회사 임원과 회사에서 나온 책들과 출판계와 노동 현실과 나라 수준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등등을 두서없이 비판했다. 친구들은 하나둘 멀어졌다. 반복되는 푸념에 지쳤을 것이다. 한 친구는 대놓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출판계가 어려운 줄 몰랐냐고, 몰랐다면 멍청한 거고, 알면서 갔으면 불평하지 말라고. 그 간단한 알고리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아, 결국 또 내 잘못이었군.

책상은 차곡차곡 정리되는데 심사는 자꾸 어지러워졌다. 행여 두고 가는 것이 있을까, 괜히 가져가는 것은 없을까, 노심초사하며 몇 번을 확인했다. 이 회사에 내 흔적 따위는 남지 않도록, 제발 내 삶에도 이 회사의 흔적 따위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망한 바람으로. 그러자 아까는 쳐다도 안 봤던 담당 책들 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잡히지 않는 광어』. 한 노작가가 등단 40주년을 맞아 자선작과 신작을 함께 묶은 소설집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맡은 문학작품이기도 했다.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작가지만, 주말에도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다소 불쾌한 기억도 있는 저자이지만, 그래도 마흔에 등단하여 반평생 부단히 문학을 했다는 면에서 나를 탄복케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교정지와 함께 보낸 편지가 책 가운데 꽂혀 있었다.

K님의 꼼꼼함에 감탄했읍니다.
내 스스로 문장의 호흡이 매끄럽지 못하다 생각했던, 그래서 찜찜했던 대목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했네요. 첫 번째 활자화될 때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p. 9. “부러” 좋습니다. 내 의식 속 사전에는 “우정”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주 튀어나오는 단어인데 새삼 찾아봤더니 국어사전에는 없네요.
p. 27. “반증”과 “방증”, 어느 쪽인지 자꾸 헷갈리네요. K님의 판단에 맡기겠어요.…

첫 줄부터 “읍니다”가 거슬렸지만, 손으로 꾹꾹 눌러쓴 그 편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책이 나오면 저자와 주고받은 교정지는 바로 버리거나 책상 한구석에 처박아 두는데, 이 편지만큼은 책 사이에 고이 접어 꽂아 놓았으니 말이다. 앞으로 수많은 저자들과 이렇게 서로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품고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얼마나 헛된 꿈이었는지. 나는 잠깐 망설이다 그 편지만 가방에 넣고 책은 도로 책장에 꽂아 두었다.

“선배님, 여기 일지요.”

오후 5시가 되자 어김없이 후배가 일지를 넘겼다. 내 이름과 그 옆에 있는 빈칸에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오늘은 무슨 일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편집자가 편집하지 않았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그러한가, 사람이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혹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한 것은 아닌가, 이상한 말이다, 사실 나는 청소를 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두어야 할 것을 두고 챙겨야 할 것을 챙겼다, 나는 나를 치웠다, 아니, 지웠다, 지워졌다, 이 지워지는 작업을 나는 여기에 적어야 하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 나는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나는 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제 곧 이름이 있는 칸도 사라지겠지, 그리고 금세 다른 이름이 여기에 적히겠지, 적히고 또 지워지겠지.

17:12~18:48
언제까지 수업료

총무팀장이 나를 찾는단다. 퇴직금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찾으셨다고요?”

“어, 거기 앉아요.”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런 그를 한동안 빤히 쳐다본다. 대표의 사위이자 부편집장의 대학 동기. 누구에게나 허허허 잘 웃고, 늘 땀을 흘리고 있는 이 남자. 나는 이 전형적인 무골호인을 볼 때마다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자신이 명문대와 대기업 출신이고 현재는 한 회사의 총무팀장인데, 나는 왜 이 사람을 누구‘의’ 누구, 또 누구‘의’ 누구라는 사실부터 떠올리는가. 그가 빙부에 의해 여기 왔고, 그런 그가 다시 친구를 여기 오게 했다는 사실이 그에 관한 다른 사실들을 모두 압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관계 덕에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관계 탓에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전자의 상황에서, 그 이익이 생계와 지위에 관한 것일 때, 그리고 그 이익이 능력이나 노력으로 입증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수혜자를 낙하산이라고 부른다.

“K씨, 내가 4년 전에 멀쩡히 잘 다니던 대기업 그만두고 왜 여기 온 줄 알아요?”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데 ‘왜’는 몰라도 ‘어떻게’는 알지. 이 낙하산님아.

아무 반응이 없자 그제야 낙하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오전에 봤던 아쉬워하는 표정은 찾을 수 없다. 그는 지금 웃고 있다.

“허허허. 이 작은 출판사를 키워 보고 싶었어요. 허허허. 내 손으로 직접. 허허허.”

허.

“허허허. 좋은 저자 만나고, 좋은 책 많이 팔고, 돈 많이 벌어서 사세 확장하고. 허허허.”

참.

내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낙하산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진지하고 엄숙하다.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장인어른, 아니 대표님 방식이 구식인 건 나도 잘 알아요. 그 독재자 스타일 바꿔 보려고 나도 노력 많이 했다고, 처음엔. 그런데 K씨도 잘 알잖아. 그 양반, 아니 대표님 남의 말 잘 안 듣는 거. 자기 멋대로인 거. 그래도 나는 멀리 보고 여기 온 거니까, 어차피 대표님이랑 평생 일할 거 아니니까. 차근차근 개선해 보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친구도 불렀고. 그런데 젊은 편집자들이 얼마 못 견디고 계속 나가요. 다 같이 으쌰으쌰 해보자는데 자꾸 나가 버리면, 그럴 때마다 내 속이 어떻겠어요? 응? K씨,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짧은 순간 적절한 반응을 찾기 위해 두뇌를 가동한 결과, ‘용건만 간단히’라는 답이 나왔다.

“퇴직금 정산은 어떻게 하나요?”

“허.” 그가 기가 찬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나도 그 사람 얼굴을 새삼 뜯어본다. 표독스러운 눈매, 툭 튀어나온 이마, 그리고 여기 와서 벗어지기 시작해 이젠 제법 넓어진 머리 위 공터. 닮았다. 이제 보니 그 사람과 똑 닮았다.

그래도 낙하산은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내 굳은 표정을 풀더니 퇴사와 관련한 제반 사항을 안내했다. 이번 달까지만 나와라, 갑자기 퇴사하게 되었으니 한 달 치 임금을 더 주겠다, 연차수당은 작년과 올해 각각 여름휴가 3일과 대체휴일 3일을 제하고 계산하겠다 등등. 나는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고 총무팀 사무실을 나왔다. “이번엔 비싼 수업료 치렀다고 생각해. 금방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아직 젊으니까.”라는 8살 많은 형의 격려를 뒤로한 채.

편집부에 돌아오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다. 오늘 참 길다. 어서 퇴근하고 싶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 이불을 푹 눌러 쓰고 머리가 아파 더 이상 잘 수 없을 때까지 일어나고 싶지 않다. 동시에 나는 술을 마시고 싶다. 친구와 마셔도 좋겠고, 혼자 마셔도 좋겠다.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가득 따라서 목구멍에 들이붓고 싶다. 그러다 혼절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나는 또 동시에, 그리고 또 동시에…. 일단, 이곳을 얼른 나가고 싶다.

짐을 다 챙기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T에게 연락이 와 있다. 열악하기로 정평이 난 출판사를 입사 두 달 만에 그만둔 뒤, 거의 1년 넘게 백수인 친구다. 백수라고는 하지만 유명 문예지에서 등단했고 권위 있는 문학상도 받았으며 대형 출판사에서 시집도 한 권 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직장 없는 시인이다. 꾸준히 출판사에 지원서를 넣긴 하는 모양인데, 출판사가 시인을 꺼려하는지 아니면 시인이 취업에 별 열의가 없는 것인지 줄곧 일이 없다. 오늘도 술이나 마시자는 연락이다. 그래, 오늘은 너랑 마시마. 아니, 니가 나랑 마셔 줘라.

“오늘 저녁 약속 있니?”

뭐가 그리 좋은지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던 편집장이 오늘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다. 이제 퇴근 시간인데.

“예.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편집장은 내 대답에 더욱 고양된 표정이다.

“그래?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 했는데. 난 돈 굳어서 좋지, 뭐. K씨, 나 밥 산 거다?”

어차피 법인카드로 살 거면서 왜 자기 돈이 굳는 것처럼 저리 좋아할까. 직원들에게 계속 법인카드로 생색내다 보니 그게 자기 카드라고 착각하는 걸까. 아니면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계속 몸담았던, 아마도 그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게 될 이 회사가 자기 회사라고 믿는 걸까. 모르겠다. 이제 알아서들 하시죠.

나는 잠깐 망설이다 굳이 또 대답한다.

“네, 잘 먹었습니다.”

편집장은 이미 자기 모니터로 들어간 상태다. 뚫어져라 모니터를 응시하고,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물아일체. 편집장이 곧 컴퓨터고, 컴퓨터가 곧 편집장이다. 뭐 저리 할 일이 많은지. 저러다 완전히 기계가 되지 않기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불상사는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사무실을 괜히 한 번 둘러본다. 잘들 계십시오. 안녕히.

20:01~0:04
상시 채용

T는 진작 취했다. 처음에는 내 얘기를 좀 들어 주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기 하소연을 하고 있다.

“야, 너넨 감금은 안 시키잖아. 내가 다녔던 회사 대표는 마감 지키라고 하도 들들 볶아서 맨날 야근이었어. 하루는 지금 맡은 책 마무리 못하면 집에 못 간다 그래서 다음 날 밤 9시에 퇴근한 적도 있다니까. 무려 36시간 감금.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치가 떨려.”

내가 이번 달까지만 다닐 회사는 확실히 그런 적은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았던 걸까. 그나마 운이 좋아 그런 회사라도 다닐 수 있었던 걸까. 대표가 폭언과 인격 모독을 일삼았지만, 오랜 시간 일해도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렇다고 일이 즐거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달 돈은 벌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매일 집에서 잠은 잘 수 있었으니까. 고작 그래서 나는 다행이었던 걸까. 서글프다. 어쩌다 우리는 불행을 경쟁하게 된 걸까.

T는 진작 취했고, 나는 아직 취하지 못했다. 벌게진 눈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T를 내버려 두고 계속 독작했다.

소주 2병을 혼자 비우고 3병째를 시킬 때, T가 킥킥대며 핸드폰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야, 너네 회사 어쩜 이러냐? 크크크. 나도 한번 써볼까? 캬캬캬. 야, 아까 했던 말은 취소다, 취소. 너네 회사가 더 웃겨. 푸하하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T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화면 속엔 회사 블로그에 올라간 “[공고] F출판 편집자 상시 채용제”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었다.

F출판사는 함께 책을 만들 신입 편집자를 상시 모집합니다.
상시 채용의 지원자는 함께 책을 만들어 갈 인재 Pool로 등록됩니다.
상시 채용은 별도의 마감일정이 없으며, 채용 Needs 발생시 제출한 지원서를 검토하고 합격자에 한해 개별 연락합니다.
[담당업무] 단행본 편집/교정/교열 및 기타 부대업무
[자격요건] 4년제 대학 졸업자, 인문사회계열 우대
[근무조건]
급여체계: 3~4개월 인턴근무 이후 연봉제, 4대 보험
근무처: 파주출판단지(합정역에서 광역버스로 30분 소요)……

나는 완전히 풀려 버린 눈으로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상시 채용’이라니, ‘Pool’이라니, ‘Needs’라니. 너무 취해서인지 원래 아둔해서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회사 원래 이런 걸 했던가? 나는 언제까지 출근이었지? 그런데 이건 도대체 누가, 언제 올린 거지? 게시물의 작성 시간을 보니 19:05이다. [접수방법]에 쓰인 메일 주소는 편집장의 사내 메일이다. 싱글벙글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려 대던 편집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T는 그새 술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나는 술잔에 술을 붓는다. 상시적으로 술이 부어지고 있다. 술이 넘친다. 상시적으로 술이 넘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