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컨펌, 우울

김광현

‣ 모두 허구다. 실제와 비슷하다 않다 추정할 것도 없다.

2021년 10월 19일 화요일

출판학교 마케팅반 졸업일이다. 롯데마트 아울렛에서 엄마가 골라 준 위아래 합해 삼십사만 원짜리 네이비색 정장을 입었다. 구두도 신었다. 이것도 아울렛에서 샀다. 십구만 원짜리다. 그동안 열심히 했다. 아마 내가 가장 열심히 했을 거다. 빠진 수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출판학교에 도착해 그날 배울 것을 미리 훑었다. 거의 모든 수업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중 궁금한 것들은 모두 ‘티 나게’ 물었다. 에이포 열 장을 써서 내는 리포트면 스무 장을 써냈다. 대학교처럼 성적순대로 학점을 매겨 줄 세운다면, 당연히 수석졸업은 내 차지였을 거다. 선생님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다. 책을 이해하는 감각이 뛰어나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타고났다는 거다. 출판일 할 사람한테는 최고의 상찬이었다. 내 예상으론 ‘이건수’라는 학생이 뛰어나다고, 우리가 기다려 마지않았던 출판 인재라고, 이미 출판계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거다. 이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출판사에 돌리고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이건 자만이 아니다. 내가 그동안 행한 것들에 증거한 확고한 사실이었다.

2021년 11월 12일 금요일

집에서 사타구니를 긁다.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잡코리아를 살펴보고, 낮잠을 자다.

2021년 12월 13일 월요일

면접을 봤다. 떨어졌다.

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면접을 봤다. 또 떨어졌다.

2022년 1월 14일 금요일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날짜를 잡았다. 규모가 좀 있는 중견 출판사였다. 기뻤다.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면접 장소에 갔다. 사무실은 합정역 이 번 출구 가까이에 있었다. 어느 건물의 사 층을 다 썼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사무실 전체를 쓱 보았다. 사람이 열 명쯤 있었다. 넓었다. 모두 큼직한 책상을 썼다. 눈에 보이는 환한 화면은 모두 듀얼모니터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저씨가 맞아 주었다. 먼저 온 사람이 면접을 보고 있었다. 이십 분가량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면접실로 들어갔다. 아저씨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명함을 받았다. 한 명은 사장이고, 한 명은 이사였다. 사장은 처진 눈매에 눈가 옆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서려 있고, 얼굴 톤이 약간 붉었다. 인자해 보였다. 이사는 숱 많은 머리를 칠 대 삼 비율로 빗어 넘기고, 네모난 갈색 뿔테 안경을 썼다. 강인해 보였다. 두 사람은 많은 질문을 했다. 출판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출판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어느 선생님께 무엇을 배웠는지. 성격은 소극적인지, 적극적인지, 그 중간인지. 마케팅 및 영업 실무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자기네 출판사를 알고 있는지. 그 외 등등. 질문 하나하나를 천천히 곱씹으며 차분한 톤으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면접을 보면 볼수록 면접관들이 좋아졌다.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봤다는 게 느껴졌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기반한 질문을 던졌다. 엉뚱한 물음은 없었다.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은 조심스레 피하고 있었다. 내 대답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양 귀담아들어 주었다. 면접이 끝났다. 면접 전에 봤던 머리가 하얗게 센 아저씨가 들어와 흰 봉투를 건넸다. 면접비였다. 처음 받은 면접비였다. 무려 이만 원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약간 감동도 받았다. 이 작은 성의에서 나는 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았다. 느낌이 좋았다. 이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2022년 1월 20일 목요일

집에서 사타구니를 긁다.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전화가 왔다. 사장님이었다. 면접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다시 날짜를 잡고 면접을 봤다. 사장님이 경제경영팀 편집자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한테서 무언가를 봤을까. 일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알았다고 했다. 그 자리엔 이사님과 경제경영팀 팀장님은 없었다. 출근 날짜가 정해졌다. 드디어 내가 해냈다. 홈런을 날렸다.

2022년 1월 22일 토요일

결국 편집자였다. 먼 길을 에둘러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은 편집자였던 거다. 출판학교 다닐 때 동기들로부터 편집자가 어울릴 거라는 소릴 몇 번 듣기도 했다. 편집자반 교수님은 자기네 반 학생들보다 날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 성정엔 편집자가 잘 맞았다. 결국 제 갈 길 찾은 거였다. 성실한 신입이 되고 싶었다. 출판학교 다닐 때 편집의 기초를 배웠지만, 한참 부족했다. 알라딘에 들어가 ‘편집자’로 검색했다. 김학원이 쓴 『편집자란 무엇인가 2판』(휴머니스트, 2020), 정은숙이 쓴 『편집자 분투기』(바다출판사, 2004), 여러 명이 함께 쓴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부키, 2009)가 좋아 보였다. 내용이 튼실할 것 같았다. 바로 구매했다. 이틀 안으로 올 것이다. 나는 이제 경제경영서 편집자다. 근무 시작일 전까지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도 열 권 정도 빌려서 읽어 볼 참이다.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팀장님께 인터넷 서점 문자 메시지 광고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잘 쓰면 판매가 꽤 늘어난다고 했다. 배 이상으로 늘 수도 있다고 했다. 중요한 임무였다. 머리 굴려 열심히 썼다. 에이포 용지에 ‘인쇄’해 팀장님께 보고했다. 퇴짜 맞았다. 조사의 쓰임이 적절치 않다는 이유였다. 조사를 삭제하거나, 다른 조사로 바꿔 보라고 했다. 좋은 조사를 써 문장이 더 힘찬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돌아와 책상 앞에서 생각해 보니,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조사는 전체 문장의 퀄리티를 좌지우지하는 마법의 문장 성분이었다. 조사가 관건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조사를 수정하거나 뺐다. 다른 부분들도 조금씩 더 다듬었다. 이만하면 완벽하진 않아도, 좋아 보였다. 팀장님께 보고했다. 퇴짜 맞았다. 카피들의 전체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듣고서는 바로 이해를 못했다. 되물었다. 그러면 전체 뉘앙스를 어떻게 수정하면 될까요. “더 힘차게”란 답이 돌아왔다. 더 묻고 싶었지만, 멍청해 보일까 봐, 알아들은 척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뉘앙스라. 뉘앙스. 대체 뭐가 문제일까. 힘차다는 느낌은 또 뭘까. 내가 생각하는 ‘힘참’과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힘참’이 다른 걸까. 그렇다면 이 간극은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왜 처음 피드백 주실 때 뉘앙스 이야기는 안 하실 걸까. 아니, 팀장님과 합을 잘 맞춰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려면 ‘뉘앙스’란 단어의 정의부터 정확히 규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홉 번을 더 수정했다.

2022년 2월 23일 수요일

저자 소개 글을 작성했다. 에이포 한 장 분량이었다. 작성하고 출력해서 팀장님께 보고했다. 거의 모든 문장에 빨간 밑줄이 그어졌다. 열세 번가량 수정했다.

2022년 2월 24일 목요일

컨디션이 하루 종일 좋지 않았다. 어제 잠을 잘 못 잤다. 요즘 자다가 자꾸 몇 번씩 깬다.

2022년 3월 11일 금요일

내 옆자리 선배랑 점심을 같이 먹었다. 선배가 회사 생활에 어려운 건 없냐고 물었다. 난 어려운 거 없다고. 모든 건 잘 돼 가고 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2022년 3월 17일 목요일

표지 디자인을 발주할 차례였다. 쓰기 전 전임자가 써 놓은 표지 발주서를 쭉 봤다. 어렵지 않았다. 회사에서 쓰던 기존 양식을 쓰면 됐다. 표지디자인 전체에 책의 콘셉트가 녹아들게 버무리고, 회사의 기존 표지디자인 톤앤매너를 고려하며 내 취향을 조금만 섞어 완성하면 되었다. 한 번에 컨펌받고 싶었다. 표지발주서를 다 쓰고 혹시 몰라 옆 선배에게 보여 주었다. 잘했다고 했다. 딱히 꼬집을 점 없는 아주 ‘스무스’한 표지디자인 발주서라고 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에이포 용지에 컬러로 인쇄해 팀장님께 보고했다. 발주서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위에 큰 엑스 자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쫙쫙 소리가 들렸다. 책의 콘셉트 설명이 너무 짧다고 했다. 간명한 건 좋지만, 디자이너가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길이는 돼야 한다고 했다. 레퍼런스로 넣은 기존 책표지들도 너무 교양 인문학책 같다고 했다. 이 책은 정통 경제경영서다. 이렇게 레퍼런스들이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고 예쁘면 안 됐다. 또 경제경영서는 제목을 크게 때려 박아야 했는데, 제목이 충분히 큰 레퍼런스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레퍼런스들을 설명하는 문장들도 문제였다. 디자이너가 레퍼런스에서 참고할 만한 부분만 부각해서 적으라고 했다. 지금의 내 설명들은 길고, 지리멸렬하다고 했다. ‘지리멸렬’이란 단어를 듣고 상처받았다. 아팠다. 여덟 번 수정을 더 했다.

2022년 3월 31일 목요일

오늘부터 보도자료를 작성해야 한다. 한 글자도 못 썼다. 하얀 화면만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 두근거림은 친숙해졌다. 더해서 머리가 아팠다. 누가 호미로 내 앞머리를 마구 찍어 내리는 것 같았다.

2022년 4월 11일 월요일

사장님 방문을 두드렸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다. 사장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 주었다. 난 팀장님의 마이크로매니징 ─ 적절한 단어 선택을 위해 전날 구글에서 찾은 단어였다 ─ 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마이크로매니징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일할 의지를 꺾고, 창의력을 고갈시키고, 적극성을 말살시켰다. 무엇보다 회사 생활이 괴롭다고 말했다. 팀장님께 첫 보고 하기 전부터 수많은 컨펌의 굴레에 오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가슴 두근거림이란 진짜 신체 증상을 겪고 있다고도 말했다. 사장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내 말을 다 들어 주었다. 사장님은 팀장님의 그런 단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팀장님의 그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거였다. 그 장점으로 지금까지 팀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거라고 했다. 이 문제는 윗선에서 개입하기보단, 팀장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해 풀어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했다. 사장님 방을 나왔다.

2022년 4월 12일 화요일

꿈을 꾸었다: 어느 한 남자가 봉두난발을 한 채 책들을 우리 팀장님께 마구 던지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그 광경을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며 물개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의 왼편엔 사장님이 오른편에는 이사님이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팔과 다리를 유연하고 흥겹게 놀려 대며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2022년 4월 20일 수요일

깨어났다. 두 시 삼십팔 분이었다. 우울했다. 자다 깨서 바로 우울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오늘 또 출근해야 한다. 오늘 또 출근해서 책의 콘셉트를 잡고 카피들을 써야 했다. 쓴 것들은 또 수십 번 수정해야 하리라.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하리라. 나는 수정 속에서 길을 잃고, 울분을 삼켜야 하리라. 회사에서 내 역할에 대해 고민하리라.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어느 건물 사 층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나를 떠올리며 나의 실존에 대해 나 자신에게 질문하리라.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그냥 에라이, 세상이 무너지길 바라리라. 우울했다. 정말로 우울했다. ‘죽음’ 생각이 났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냥 죽음이 생각났다. 죽음, 죽음, 죽음.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죽음은 때가 되면 오는 게 아니었다. 지금 죽을 수도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삐져나왔다.

2022년 5월 9일 월요일

출근했다. 별일 없었다.

김광현 대학에서 철학과 영화를 전공했다.
몇몇 출판사에서 경제경영서 편집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