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범
끝까지 도망치자
우리는 결의에 차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빵을 나누어 먹다가 누군가 떠나면 일어서
럭비공처럼 길어졌다가 자세를 고쳐 다시 원을 만들고
앞뜰은 정방형을 사랑하는 왕의 취향
그가 임명한 정원사의 마지막 걸작
왕국의 명물인 푸른 나비의 유일한 서식지에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몰려들었지
잘 모를 땐 누구나 평화주의자 같아서
바람만 불어도 다 같이 함성을 질렀다
세 명인지 네 명인지 나비를 키우던 우리는 결의에 차서
버려진 뒤뜰에 모였다 남은 빵을 나눠 먹으며
붉은 벽돌도 주워서 꿰차고
우리는 결의에 차서
아무도 우리를 못 찾았으면 좋겠어
누구라도 오면 절대로 동정하지 말고 죽여 버리자
곱슬머리에 빨간 셔츠를 입은 정원사가 뒤뜰로 들어선다
사실 그는 뒤뜰에 있는 오두막에 살았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지
너는 불현듯 뛰쳐나가 그의 머리를 빨간 벽돌로
한 번
두 번
내리찍고 정원사가 제발 제발 외치는데도 너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멈추라고 하기도 전에 너만은 결의에 차서
돌아오지 않으면 누군가 찾으러 오지 않을까
뒤뜰에는 투명한 빵 봉지, 모래와 벽돌 같은 것이 여전히 많으니까
일단 도망치자 우리는 결의에 찼으니 벽돌도 몇 개 주워서
그런데 너 벽돌은 어떻게 했니 아무 데나 버렸다고
우리 곧 잡히겠구나 끝장이구나 하지만 일단 가 보자
고개를 넘고 골목을 내달리고 공터도 가로질러서
처음 보는 문이 보일 때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두들기면서
그를 죽인 건 실수였을까
자물쇠가 바깥에 달린 공중화장실은 숨기에 좋아 보였지만
마지막 사람을 정하지 못해서 우리는 다시 도망쳤다
끝까지 가자 곧 잡히겠지만 다 같이 가는 거야
세 명이었던 우리는 어쩐지 두 명이 된 것 같고
길이 자꾸 푸르고 정갈해져서 무서웠다 참을 수 없으면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용감했다
열심히 도망치는데 왕궁이 점점 커진다
왜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거야?
감은 눈을 뜰 때마다 이야기가 눈물처럼 쏟아진다
흙투성이의 길이 그걸 받아먹어 자꾸 더 건강해지고
없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
세 명인지 네 명인지 우리는 결의에 차서 계속 도망친다
앞뜰에서 뒤뜰로 뒤뜰의 뒤뜰에서
푸른 나비의 소문이 사라진 곳까지
추일범 2022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할 줄 알았다.
성북에서 밥을 벌고 영등포에서 깬다. 모든 일이 두 번째 같다.
zardcib@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