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김준섭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쓰려고 애쓰는 중이다. 은지와 해임은 내 동료들과 이름이 같지만, 당연하게도 만들어 낸 인물이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이름이 같으니 둘을 아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은지는 편집자고, 해임은 디자이너다. 해임은 서른세 살이고, 은지는 스물다섯 살이다.

나의 구글 주소록에는 둘의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은지(추앙하는 후배)

해임(봄날의 햇살)

물론, 둘의 주소록에서 나는…… 그냥 ‘김준섭’이다.

모두가 외근을 나간 출판사 사무실에 혼자 남아 소설을 쓰고 있으면 뒤통수를 타고 이런 의문이 휙 넘어온다.

은지는 정말 해임을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것도 같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같다. 간식 선반에서 다이제스티브 다크초코맛 두 봉을 집어 자리로 돌아가면서 슬쩍 하나를 해임에게 건네 줄 때의 은지는 확실히 해임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점심시간에 ‘아바라’를 손에 들고 축지법으로 저만 홀로 휘적휘적 걸어갈 때의 은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해임은?

해임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도 같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같다. ‘봄날의 햇살’이라서,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의 해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나는 해임에게 ‘그냥 김준섭’이라서 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은지가 해임을 사랑하는 것이 확실해져야, 소설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사랑하는 것도 같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같으니, 가끔은 속이 답답하다. 나는 퇴근해 나무 식탁에 홀로 앉아 샐러디의 멕시칸랩과 참깨라면 작은 컵을 번갈아 먹다 말고 회사에서 준 나의 인생 첫 맥북을 가져와 켠다.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라는 첫 문장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며 서투른 젓가락질로 ‘면치기’를 한다. 그러다 컵라면에 고추기름을 넣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멕시칸랩에 고추기름을 끼얹으며 은지와 해임 이전의 문장을 떠올린다.

사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거였다.

현우는 준섭을 사랑한다.

현우는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대표 이름이고, 나는 대표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지만, 두 이름을 사랑한다로 연결하니, 꽤나 낭만적인 문장이 된 것만 같다고, 비에 젖은 양말을 벗을까 말까 고민하며 걷던 중에 나는 생각했다.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영진종합시장을 지나 망원역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허름한 백반집 슬레이트문에 붙어 있는 돈까스라고 적힌 흰 종이가 비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언제나 비바람에 흔들리는 흰 종이 같은 꼴이겠지. 현우와 준섭이라도. 은지와 해임이라도. 오늘따라 망원역은 왜 이리도 먼지.

은지는 해임을 사랑할까?

은지가 해임을 사랑하면 좋겠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라고 벅벅 소리를 지를 사람들도 아니니까. 내가 진실을 알게 될 일은 없다. 사랑하거나 말거나 모두 다 내 머릿속에서만 생겨났다가 내 머릿속에서만 사라질 생각들이다.

사랑은 [↔]이 아니어도 되고, [→]여도 되며, [←]여도 된다. [↓]나 [↑]여도 상관이 없다.

내 인스타그램 소개글에는, “사랑은, 드문 겁니다. 모르세요?”라는 누가 보더라도 어쭙잖으면서도 간드러지는 문장 하나가 적혀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보다는, 사랑이 드물다는 걸 아는 것이 내겐 중요하다. 지금 내겐, ‘은지’와 ‘해임’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 동료들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 그게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게 해 준다.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

현우는 준섭을 사랑한다.

라는 문장을 쓰면서 나는 지금의 회사를 사랑해 보기로 결정했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도 아니고, 디자이너를 사랑한 편집자도 아니고, 출판사를 사랑한 편집자가 되기로 한 나의 결정이 가끔은 나조차도 소스라치게 무섭고 놀랍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 팔자인 걸.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될 소설이 실리게 될 곳은 읻다 출판사의 네이버 포스트이다. 편집부 직원들 저마다 하나의 시리즈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글을 쓰기로 했는데, 나는 소설이 제일 쓰기 쉬울 것 같아서 그런 결정을 했다. 물론, 지금은 후회막심이다.

소설 쓰기에 대해 후회를 하다 보니, 영진종합시장이 시장인지 아닌지 고민하다 보니, 구글 주소록에서 은지(추앙하는 후배)를 은지(소덕동 장겨울 쌤)로 바꾸다 보니,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인간실격〉을 번갈아 보며 잠들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문장이 스르륵 써졌다.

해임도 은지를 사랑했다.

비록 현재형은 아니더라도. 사랑했다니 다행이다. 나에게도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수없이 일해 왔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 문장도 쉽게 써졌다.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그 뒤로는, 그렇게 줄줄…… 내 인생이 휘어지고 휘어져 ‘읻다’라는 출판사에 오고 만 속도만큼이나 소설은,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써졌다.

나는 이제 고통을 기를 수는 없어서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한 풋내기 출판인이 아니다. 이왕 머리를 기르는 거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기르려고 애쓰는 05학번 편집자다. 길어져라 길어져라 길어져라 내 머리카락아, 라고 말하는 대신,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05학번 이즈 히어, 신도시에 사는 편집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다면…… 읻다의 네이버 포스트에 오면 되겠지만, 그게 궁금할 일인가? 은지와 해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또 몰라도.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렇게 동료와 함께 일을 시작할 수 있다니 참 다행이다.

은지는 해임을 사랑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부디.

가늘고 가늘고 길게 행복하게.

김준섭 편집자.
읻다 출판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