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정 edited by 여은하·지다율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풍요의 계절이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희명이 보내는 올해의 가을이 그러했다. 희명, 혹은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보내는 하릴없는 시간과 그 속의 언어들은 애저녁에 죽어서 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나 목욕탕 주인의 담화가 미치지 않는 곳에 안장되어 있다. 이따금 주거, 직업, 가정 등으로 보장되는 언어를 가진 분들이 원룸촌에서 버러지같이 꾸물거리는 희명 같은 자들을 보고 청년실업과 구직난, 사회정의와 분배의 역할 등 저희들이 가진 언어로 희명을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물론 희명과 같은, 언어 없는 자들은 꾸물거리면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예쁜꼬마선충’에게 언어체계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 누구도 희명에게 언어체계를 기대하지 않을 터였다. 집적회로와 실리콘만으로도 재현이 가능하다는, 예쁜꼬마선충의 DNA 염기서열의 수식에 기반한 간단한 움직임. 마치 사람의 몸으로 이를 재현하듯이, 희명은 그의 생존에 기반한 가장 간단한 반응만을 보이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방사능 낙진과 같은 언어의 홍수들에 대응해 나가는 삶을 이어 왔다. 이제 희명이 마지막으로 적(籍)을 가졌던 시절로부터, 이러한 시간이 수차례 흘렀다. 그러한 계절도 이제, 끝물에 접어들 즈음의 일이었다.
건축연한 30년을 넘긴 복도식 아파트. 아파트와 같은 세월을 겪은 우체통들은 군데군데 부서진 문짝을 열어제낄 때마다 떨어지는 녹 부스러기에 작열통을 겪는 화상 환자처럼 비명을 지른다. 그 끔찍한 소음들 속에 마치 외과 전문의의 수술을 방불케 했을 집배원의 작업 끝에는, 19세기의 어수룩한 의사가 방혈 치료라도 한 양, 구더기 같은 고지서 뭉치가 우체통 밖으로 뭉그적대며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이 작은 응급외상센터의 한복판에서 동원예비군 통지서를 찾아냈을 때 밀려왔던 분노도 잠시뿐, 희명은 그것이 그저 타인의 분노를 복사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실, 예비군 통지서에 분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 소득에 비해 현저히 저평가되는 그들의 용익, 그리고 몹시 비효율적이고 일방적인 시간의 안배에 분노한다. 어쩌면, 역사를 전공할 정도로 몹시 운이 좋지 않은 혹자는 1차 세계대전 전야의, 이른바 ‘8월 열광1‘8월 열광’이란 1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던 1914년 8월경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전쟁당사국에서 벌어진, 전쟁 수행을 지지하던 열광적인 대중의 반응을 말한다. 수 주간 찬전(贊戰)시위와 집회가 벌어졌으며 언론은 과격한 논설을 연일 게재하며 이를 부추겼다. 마침내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연이어 당사국들의 선전포고가 이루어지자, 각국에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자진입대 행렬이 이어졌다.’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적 필요에 의해 생성되는 회수 불가능한 전쟁수행기계로서 동원령 그 자체의 성격에 분노할 터이다.
그러나 희명은 어차피 마땅한 직업이 없기에 벌이도 없고, 따라서 예비군 훈련으로 인한 손해도 없다. 어차피 하루 종일 들어앉아서 이세계(異世界) 기행에나 몰두할 것이니 식대라도 아끼고 과자 두어 개 사 먹을 수 있는 교통비나마 받는 것은 그가 보낸 요 근래의 1년여를 통틀어 꽤 대단한 흑자에 해당한다. 또한, 공립학교 12년을 거쳐 국립대 4년, 군대 2년에 이르기까지 도합 18년의 체계적인 국가교육과정을 하자 없이 수료함으로써 희명의 국가에 대한 충성은 여지없이 증명된 바였고, 그 결과 수여된, 두 장의 중질지에 인쇄된 학사 학위라는 것은 학자적 양심을 소명할 기회 따위 포기한다는 각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명은 즉각적인 응소(應召)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날 이후로도 희명의 응답을 애타게 바라는 상근 예비군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증오와 분노를 담아 써 내려갔을 몇 차례의 문자 메시지와, 오후 4시경에 울려와 서로가 피곤과 나태에 절어 있음을 날것 그대로 전달해 주고자 하는 확인전화들이 수차례 울려 왔다. 마침내 ‘이번에도 불참하면 고발조치 하겠다.’는 동대장의 최후통첩을 받고 나서야, 희명은 예비군지휘관의 지휘결심에 도움이 될 긍정적인 작전행동을 제공하기로 마음먹어야 했다.
모든 것이 ‘통제로웠던’ 군 시절에 비해 지나치게 자유분방해진 희명의 몸은 다시 군복에 욱여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아침 공기를 마시기도 전에 숨부터 막혀 왔다. 군화 끈을 졸라매면서 마치 ‘외계인 손 증후군’ 환자처럼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뒤뚱거리며 집을 나서서 두 번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단추는 위아래로 두 개가 터져 나갔고, 정거장을 지날수록 사람은 줄고 예비군은 늘었다. 버스에 탄 예비군들은 하나같이 ‘사코 디 로마21527년 이탈리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교황군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로마 시를 약탈하고 파괴한 사건. 많은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파괴, 도난 당했으며, 이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라고 평가받는다.’의 현장이라도 목격하고 온 듯한 황폐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숭주 예비군 훈련장에 들어선 희명은 어쩌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어쩌면 여러모로 대비도 할 수 있었으나 결코 원하지는 않았던 조우를 해야 했다.
“야 저거 이희명 아냐? 야, 이희명!”
만나기로 약속 한 번 한 적 없지만 마치 두어 시간은 기다린 양, 발악하듯이 희명의 이름을 내지르는 이가 희명의 초·중학교 동창인 최무영, 마찬가지로 그 옆에서 코밑을 훔치며 실실 웃는 이가 서창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희명의 고등학교 동창인 남기석도 있었다. 그것은 예비군지휘관의 지휘결심에 따라 적당한 작전수행역량을 최소한의 용역을 통해 제공하고 응분의 보상을 받아 귀가하여 지난밤 못다 한 이세계 탐험을 계속하려 마음먹었던 희명의 계획을 산산조각 내는 울부짖음이었다.
“야, 우헌동 병신들이 죄다 모였구나.”
모르는 척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게 생각했던 궁색함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희명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무영이 기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랄한다. 야 너 기석이 알지? 고등학교 같이 나왔다며.”
“알지. 근데 니가 기석이를 어떻게 알어?”
“초등학교 동창이잖어.”
“그래? 너 우헌초 나왔었냐? 왜 내가 그걸 몰랐지?”
“븅신이라 그렇지. 좀 친구한테 관심이라는 걸 좀 갖고 살아라.”
하루에 14시간씩 반강제로 처박혀 있던 고등학교에서, 복도를 오가며 하루에 두어 번 마주치기도 힘든 상대에게 너무 과도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무영의 강타에 기석의 어깨가 내려앉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희명의 사고를 지배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딴 놈들은 없냐?”
창현이 무영에게 물었다.
“왜 동미참이나 기어 와서 딴 놈들을 찾냐. 걔들은 다 건실하게 사시는 분들이야. 너 같은 줄 아냐?”
의미 없는 질문에 대한 그야말로 칸트나 할 법한 답변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 자리에 모인 넷은 최소한 우헌동대장의 지휘 하에 놓인 예비군 중에서는 가장 게으르고 어리석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들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고 적나라하게 시사하는 것이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왜 사람 보자마자 시비지?”
“꼽냐? 빨리 앉어. 앞에 봐, 새끼야.”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려 노력하며 어색함을 차폐하는 신명 나는 대화들이 그렇게 십수 분을 오갔다. 창현의 “넌 뭐 하고 지내냐?”에서 시작한 대화는 곧 월급과 공수(工數), 자신이 모는 자동차를 소개하는 짧은 시간을 거쳐 ‘누구의 여자친구는 스튜어디스라더라’, ‘누구는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이라더라’, ‘누구는 마세라티를 타고 다니더라…’로 이어졌다. 연애와 취업, 결혼과 예물, 새 차와 집값에 대한 언어들이 춤췄다. 타자의 욕망에 대한 복제가 현대사회의 상사(常事)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동미참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그분들에 대한 동원 훈련 미참석 예비군들의 구두전보(口頭傳報)는 빨지 않은 군복의 시큼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예비군 훈련장 강당이라는 공간에서 나누기에는 너무나도 빛나고 화려한 나머지 ‘춤추되 나아가지 않는31814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상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개최한 빈회의에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면 회의를 중단하고 무도회를 여는 행태가 빈발했다. 이에 벨기에의 7대 리니 대공 샤를 조제프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언어에 가까웠다. 이 상황에서 그야말로 도심 속의 미생물이 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희명은 마치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벌거벗겨진 것 같았다. ‘집에서 논다’, ‘별로 하는 것도 없다’, ‘이것저것 알아본다’는 말들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희명은 일찍이 영화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 마리오 루폴로가 말했던 ‘튕겨 다니며 파도치는 언어들 사이에서의 멀미’를 새삼 느꼈다.
그러나 괴로운 시간도 잠시, 곧 최초 인도인접(引渡引接)시 앉은 자리를 기준으로 조를 짜는, 적당히 편리한 예비군의 편성기준에 의해 넷은 같은 조로 편성되었다. 단 1초라도 국가폭력이 주도하는 공간에 존재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발악하는 무영과, 나머지 세 명의 이름 없는 동조자, 그리고 여섯 명의 방관자로 구성된 이들은 교장 이동 간에는 요크 상사4앨빈 C. 요크(1887~1964)는 1차 세계대전 당시 1개 분대로 28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132명의 포로를 잡아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던 미국의 군인이다.가 울고 갈 법한 모범적인 분대행동, 서바이벌 게임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시가전 훈련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5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는 소련의 군인이자 군사사상가로, 광정면 동시접촉이론과 충격군을 활용한 종심전투교리를 제안하여 소련의 작전술 체계를 완성시킨 인물이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과감하고도 효과적인 작전술적 결단을 보여 주었다. 특히 국군 상무정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각개전투에서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온 숙녀61차 세계대전 당시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된 영국군 42 연대의 병사들은 치마 형태의 하의인 킬트를 입고 싸웠기 때문에 ‘지옥에서 온 숙녀’라는 별명을 얻었다.’들 같은 괴성을 내지르면서 망가진 수류탄 모형을 던져 적 소산진지를 폭파함으로써 모범적이고 전술적인 행동이 어떤 것인지 완벽하게 입증하였다. 심지어 소총으로 음속의 세 배로 비행하는 적 전투기를 쏴서 맞출 것을 요구하는 대공 사격 훈련조차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12시 방향으로 접근하는 적기에 맹렬하게 ‘입총’을 격발해서 교관의 찬사를 얻었다. 물론 음속을 돌파해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소총으로 맞혀 격추시킨다는 교육내용에 관해 공군 출신의 기석과 육군 출신 나머지의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결국 그에 대한 실증적 검토는 게임을 통해 확인하기로,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대개 이러한 모범적인 움직임은 가장 반발이 심했던 무영이 주도했다.
그러나 이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희명의 분대에 한 조교가 전한 진실은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다. 제대가 두 달여 남았음에도 모두가 기피하는 동미참 훈련, 그것도 앉아서 쉬기도 힘든 사격 훈련에 투입되어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있던 이 조교는, ‘동미참 훈련은 동원 훈련에 제때 오지 않은 데 대한 징벌적 성격에 가깝기 때문에, 절대 시간 외의 소집해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설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애꿎은 사격장 조교에게 화풀이를 하며 태업을 결의했다.
“선배님, 뒤쪽에서 기다리시는 선배님들 위해 조금만 더 빨리 이동해 주시겠습니다.”
“야 조교야. 동미참이라고 일찍 안 보내 준다는 게 말이 되냐? 내가 안 오고 싶어서 안 왔어? 다 국가경제에 기여하느라 못 온 거 아냐? 거기다 무슨 훈련이 줄 서는 게 반이야. 내가 나라 지키러 왔지, 줄 서러 왔냐?”
일견 타당한 비판이었지만, 여기에는 국가경제는커녕 가계경제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희명과 같은 인간도 있음을 간과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알 리가 없는 조교의 궁색한 답변은 무영의 속을 더욱 뒤집어 놓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이거 끝나고 지역대장님 상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선배님 조가 1등인 것 같습니다.”
“아니, 씨발! 집에 좀 보내 달라고, 집에! 무슨 상이야 상은. 상 받으면 더 늦게 가는 거 아냐?”
“야 최무영 열심히 좀 하지 마. 상 준다잖어.”
“야 그냥 총 아무 데나 대충 쏴.”
“서창현 너 총 하늘에 대고 땡겨라.”
“조까.”
그야말로 트로츠키 정권 하의 병사 소비에트에서 오가던 대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태업 결의안과 집총거부 선언이 마구 발표되었다. 그러나 ‘사격은 불합격 시 훈련 종료 후까지 남아 재시험을 봐야 한다’는 교관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내가 아무리 그래도 총만 잡으면 너는 이길 수 있다’는 예비군 특유의 호승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육십 발의 총성이 울린 후에는 희명의 조가 전원 사격 합격이라는 우헌동대 동미참 훈련 역사상 미증유의 쾌거를 이루어 냈다.
결국 야외 훈련이 끝나는 시각에 즈음해서는, 각각의 교장으로 흩어졌던 영혼 없는 사람들이 다시 한데로 모이고, 한 시간여를 꽉꽉 채운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소노라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 죽은 선인장만큼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만이 무난히 소화할 수 있을 법한 그 일장연설에 대해, 의외로 희명은 그를 음절 단위로 비판하고자 하는 심경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곧 우헌동 선학들의 예를 따라 2분 내 숙면을 취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한나절의 시간이 사라졌다. 마침내 집에 가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시각이 되자, 이번에는 지역대장에 의한 시상식이 이루어졌다. 앞서 조교의 말처럼 희명의 조가 최우수 분대로 표창을 받았다. 역시 중질지에 명조체로 인쇄된 표창장을 보니, 이따위 걸 받자고 단상 아래의 사람들을 집에 못 가게 한다는 사실에 희명은 못내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통비를 지급받고 집에 가려 영문을 나서니 발바닥에 날개라도 단 듯 몸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에 희명은 자신의 도덕관념이 과연 일반의 그것과 합치하는지에 대해 고뇌해야 했다.
그러나 그 가벼웠던 기분도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잔하자!”
역시 무영이 부르짖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듯한 화법이었다. 그리고 이에 창현이 가장 먼저 동조했다.
희명의 이세계 여행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 같은 야망으로 귀결되었다. 희명은 이를 반대해야 했으나 그에 적합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곧 무영과 창현의 주도로 넷은 국방부로부터 받은 몇 푼 안 되는 용역의 대가뿐만 아니라 소지하고 있는 일체의 현금을 바쿠스에게 공물로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버스를 타고 우헌 1동으로 돌아온 넷은 무서운 속도로 인근 술집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희명, 창현, 무영이 가장 즐겨 찾던 우헌고등학교 근처의 명란호프를 기점으로 인근 세 군데의 주점들은 예비군복 입은 광인 넷의 출몰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마치 자포로제의 코사크 족처럼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마셔 댔다. 그중에서도 타라스 불바7『타라스 불바』는 우크라이나 작가 고골의 소설로, 17세기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목민이었던 코사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사이의 갈등을 코사크의 족장인 타라스 불바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다.라 할 만한 이는 역시 무영이었다. 혼자서 맥주 5천 cc를 앞에 놓고 마셔 대는 그의 기개는 희명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관객도, 술집 주인마저도 기를 질리게 했다.
그렇게 술과의 대회전(大會戰)을 치르는 와중에도 그들은 중간중간 여자와 클럽과 새 차와 은사님들의 야구방망이, 그리고 다시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화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였고 은사님들의 야구방망이가 클럽에서 만난 여자의 엉덩이를 매만지다가 새 차를 부수고, 그 차주가 야구방망이를 빼앗아 은사님을 때리는 세기말의 혼란상이 입에서 입으로 구현되었다. 그들이 내팽개친 술병처럼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도 특히 격론이 오갔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3반 반장을 맡았던 여자아이가 2년 후에 임신을 했는가 안 했는가에 대한 건이었다. ‘남자친구라는 놈팡이와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동네에서 안 보였으며, 결정적으로 배가 부른 것을 보았다’는 무영의 옹호론과 ‘중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성적표에서 이름을 보았으며, 임신은 사실무근이다’라는 창현의 반박이 오가며 희명에게는 마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81946년 영국의 역사학자 모리스 돕(1900~1976)이 『자본주의 발전연구』를 발표하자 미국의 역사학자 폴 스위지(1910~2004)가 이를 반박하면서 맑스주의적 역사발전의 성격을 두고 이른바 ‘자본주의 이행논쟁’이 촉발되었다.를 방불케 하는 진지한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결국 한 불행한 여성은 정신 나간 취객들의 가위바위보로 혼전임신사실이 정해지고 말았다.
이렇듯 세 곳의 술집을 돌며 각자 수천 cc의 맥주와 평균 여덟 병의 소주, 그리고 그 수와 이름도 헤아리기 어려운 수많은 안주를 용맹하게 해치워 버린 이들은 다시 베이스캠프인 명란호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기석과 무영은 성준택이라는 인물에 대한 화제에 계속해서 몰두해 있었다.
“아니, 아까 봤다고. 작년에 그 상 받았던 사진에 성준택이 있었다니까?”
“무슨 개소리야, 성준택이 군대 가서 아직 전역을 안 했는데.”
“아니라니까? 그거 성준택이라고. 그따위로 재수 없게 생긴 게 성준택밖에 더 있냐.”
성준택 씨의 역종 전환에 대한 대화가 20여 분간 오간 것에 지친 희명은 결국 가장 원초적인 의문을 표출하여 자신이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로부터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계고(啓告)하기로 했다.
“근데 성준택이 누구냐?”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희명에게로 향했다. 무영이 되물었다.
“너 성준택 모르냐?”
“어.”
당연하다는 듯한 희명의 대답에 기석이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끄응’ 하고 머리 굴리는 소리를 입으로 내더니, 결국 그 조우의 변곡점을 찾아냈다.
“아, 그렇네. 이희명 너는 숭동중, 우헌고 나왔지. 걔는 우헌중, 숭주고 갔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 동네에서 본 적도 없냐?”
아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세계관에서, 빅 브라더를 처음 본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반응이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한 달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아 본 적이 있는 희명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희명에게는 차라리 택배 기사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는 빅 브라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븅신아, 내가 이 동네 사람을 다 알아야 되냐?”
“아니, 븅신아. 근데 모르면 맞아야지.”
“그렇네. 이 새끼 완전 성준택 모르는 찐따 아니냐? 성모찐이네, 성모찐.”
무영이 거들었다. 마치 ‘증오 시간’에 소리라도 지르는 양, 희명에 대한 취객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어떻게 성준택을 모를 수가 있냐’, ‘여태까지 뭘 하고 살았길래 그 모양이냐’는 등의 혀 꼬부라진 소리들이었다. 희명은 술기운이 도는 와중에도 그 무의미한 소음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취객들 중에서도 무영의 혀 꼬부라진 소리는 희명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했다. 무영의 목소리는 마치 플라스틱 다리가 빠진 철제 책상다리를 시멘트 바닥에 긁는 소리와 흡사했다.
“우리 이제 피차 지랄은 좀 자제하기로 하자. 근데 성준택이 누구냐고.”
“니가 알아서 뭐 하게? 성모찐아.”
“아니 근데 이 새끼가.”
결국 희명이 다음 한 마디에 무영의 얼굴을 가로수에 박아 버릴지 아니면 발로 차서 차도로 밀어 버릴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즈음이 되어서야 일행은 명란호프에 도착했다. 그리고 취객들은 또 다른 불행한 닭의 잔해와 5천 cc의 맥주를 앞에 놓고 여자와 자동차와 은사님의 은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다행히도 기석이 성준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기석이 발제하고 두 취객들이 동의한 기본적인 정보는, 성준택은 넷과 동갑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숭주시 우헌 1동으로 이사를 왔고, 우헌중학교로 전학을 왔다는 것이었다.
닭 모가지를 마우스피스처럼 끼고 긁어 대던 창현이 말했다.
“야 그 새끼 집 하이시티였잖어. 가 봤냐?”
“아, 하이시티 그때는 기깔 났는데.”
“그때 하이시티 잘나갔지. 지금도 상가 말고 집값은 꽤 비쌀걸?”
닭다리를 하나씩 잡아든 기석과 무영이 그립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하이시티는 10여 년 전 당시 우헌동을 비롯한 인근에서 가장 높은 25층 주상복합단지의 이름이었다. 숭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높이와 거대한 건평, 그리고 부지 설정 공고 이후로 주변에 근린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우헌동 인근의 지가상승률이 가파르게 상향곡선을 타는 데 일조했던 대공사였다. 지금은 숭주의 중심이 서쪽의 과계동으로 옮겨 갔지만, 당시만 해도 하이시티 1층과 지하의 매장들이 숭주시의 몇 안 되는 쇼핑의 성지나 마찬가지였다. 기석은 성준택이 그 하이시티의 꼭대기에서 살고 있었다고 했다.
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니들은 모를 건데, 전헌삼이라고 있어. 우헌중 국어 선생인데, 나 성준택이랑 같은 반이었을 때 담임이었거든? 근데 진짜 이 새끼가 미친 놈인 게 한번 찍은 새끼는 구라 안 까고 마대 자른 거 가지고 이틀에 한 번씩 두드려 팼어. 근데 성준택이 찍힌 거야. 뭐 하다 찍혔더라? 아, 뭐 숙제 안 해왔나? 뭐 그래서 찍혔는데, 일주일에 3일을 두들겨 패더라. 근데 그다음 주에 가정방문인가, 성준택이네 집에 한 번 갔다 오더니 그때부터 손도 안 대더라고.”
기석의 이야기가 끝나자 듣고 있던 창현과 무영이 맞장구쳤다.
“캬! 하이시티가 좋기는 좋구먼!”
“좋기만 하겠냐. 또 얼마나 뒤지게 멕여 댔겠냐.”
“지금은 그 지랄하면 잡혀 들어가지. 진짜 좆같을 때 학교 다녔다, 우리.”
희명의 학창 시절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희명이 기억하는 선생님들 중에도 한 손에는 잘라낸 당구 큐대, 한 손에는 마대자루를 들고, ‘천 대 패고 봉투 하나 펴기’ 전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선생님들이 더러 있었다. 그야말로 이러한 참교사들이 불철주야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른바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진행한 결과 희명과 같이 인격적 결함이 별로 없는 훌륭한 어른들이 대규모로 양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박성천 아냐, 너네?”
기석이 물었다.
“박성천이 누구야?”
“아, 왜 그 초등학교 때 있었잖아. 덩치 크고 돼지 같은 새끼. 맨날 침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 애들 삥 뜯어서 피시방 가던 놈.”
“아 알 것 같은데. 그 새끼가 뭐?”
“이 새끼가 성준택만 보면 진짜 존나게 괴롭혔거든. 빗자루 가지고 쥐어 패고, 의자에 압정 깔고, 뭐 별짓을 다했는데, 이 새끼도 한 번 걔네 집에 갔다 온 뒤부터 갑자기 안 괴롭히더라고.”
“잘사는 새끼라 삥도 존나게 뜯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냐?”
“아니. 그냥 그 뒤부터 말도 잘 안 걸고 몇 번 말 걸어도 엄청 친절하게 대하더라고. 나도 몇 번 봤는데 토할 뻔했다.”
“좀 상상이 안 가는데. 그 새끼 사람 됐으려나.”
“사람은 씨발, 오토바이 타다 대가리나 안 갈렸으면 잘 사는 거지.”
“와, 진짜 존나 싫은가 보네.”
“당연하지. 그딴 새끼 누가 좋아하냐.”
“야 박성천 결혼도 했다던데?”
“이런 미친. 어떤 여자가 그딴 대가리에 총 맞은 짓거리를 하냐.”
“아니, 구라야. 븅신아. 너무 부들거리는 거 아니냐?”
“아니, 개새끼가 진짜.”
“어쨌든, 뭐 요즘 애들 그런다며. 흥신소 같은 데서 조폭 고용해서 왕따 시키는 애들 손봐 주고. 뉴스에도 나오더만. 뭐 그런 거 아니었겠나 싶다.”
이후로 성준택의 중학교 시절의 일화들이 이어졌다. 반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자애와 잤다느니, 누구와 싸웠는데 교장실에서 일대일로 면담하고 나오자 선생들이 아예 그 녀석을 박살 내 놨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기석의 설명을 들은 무영과 창현은 꽤나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아니 성준택 그 새끼는 툭하면 결석하고 조퇴하고 아주 지랄을 하더니 여자 꼬실 힘은 있었나 보네? 골골거리는 것만 보면 무슨 백혈병 걸린 놈 같더만. 능력 좋았구만.”
무영이 말했다.
“뭘 골골거려? 내가 알기로는 아프고 뭐 그런 거 없었는데.”
“아냐 미친놈아, 하루 종일 골골거리면서 엎드려 있다가 학교 끝나면 보충도 안 하고 그냥 갔어.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는데 야자 안 하는 건 존나게 부러웠지.”
“야, 성준택 걔 키 커서 농구도 잘하고, 체육시간만 되면 날아다녔는데 뭔 소리야.”
기석이 의아해하며 반박하는 가운데 창현이 거들었다.
“맞아. 내가 알기로도 성준택 그렇게 골골거리다가 2학년 때 자퇴했다던데? 그리고 걔 키가 컸냐?
무영이 창현을 눈 아래로 보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냥 좆만 했는데. 아니지. 좆만 한 건 아니고 딱 서창현 너 정도 됐겠다. 아니 그게 좆만 한 건가?”
“이 새끼 또 지랄이네.”
기석이 반박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성준택 중학교 3학년 때 걔네 반에서 제일 컸어. 180이 넘었는데 무슨. 저런 스머프 반바지 같은 새끼랑 비교가 되냐?”
“아니 근데 왜 나만 가지고 지랄들이지? 나도 170은 넘는다고.”
“구라 치지 마라. 168인 거 다 안다.”
“그럼 니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지. 사람 키가 어떻게 줄어드냐? 거기다 공부도 좀 하던 놈인데 고등학교 자퇴를 하겠냐?”
기석의 말에 무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 개소리하지 마. 성적표로 바닥 쓸고 다니던 새낀데. 그래도 형이 매점도 몇 번 같이 가서 폴라포도 사 멕이고 잘 거둬 줬다 아니냐.”
“아니 도대체 뭔 븅신 같은 소리야. 동명이인 아냐?”
“좆만 한 동네에 동명이인이 어디 있겠냐 븅신아.”
기석이 난처해했다. 희명은 기석의 편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야, 기석이가 말하는 사람이면 나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중학교 때 키 크고 바가지머리 하고 니네 학교 교복 입고 다니고. 자전거 끌고 다니지 않았냐?”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한 희명의 증언이 술술 흘러나왔다. 희명은 중학교 다닐 때는 가본 적도 없었던 하이시티에 ‘놀러’가서 성준택과 비슷한 외양의 인물을 목격했으며, 귀가 특이하게 생겼고 팔다리가 길고 자전거를 타고 잘생겼고 같이 있던 여자애가 예뻤다는 증언까지 덧붙였다.
“야 맞네. 그거네. 너 성준택 아네.”
기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간단하게 희명과 성준택의 관계에 대해 정리해 주었다.
무영이 이를 반박하려고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창현이 대신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성준택의 외양과 성격, 음색과 억양 등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고, 여기에 기석이 이를 다시 반박하고 희명은 옆에서 기석과 함께 성준택을 날조해 냈다.
치열한 검증과 토론의 과정에서 성준택은 이제 우헌동을 대표하는, 네 명의 흙투성이 군복 입은 취객들의 언어로 빚어진 작품이 되었다. 서로 취하지 않았다고 거듭 주장하며 올라오는 취기보다 언어 속의 진실을 들여다보려 노력했던 그들은 이제 누구보다 성준택을 사랑하고 잘 이해하며 보살펴 주었던 최고의 친구들이 되어 있었다. 성준택은 그들의 친구이자 우상이었고 피호민이자 빵셔틀이었으며 혹은 그들의 언어 그 자체였다.
몇 개의 5천cc 잔이 비워지고 몇 번의 성준택 검증 청문회가 진행되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무렵, 무영과 뭐라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주고받던 기석이 갑자기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너는 좆도 모르는 새끼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니가 씨발 뭘 알아! 노가다나 쳐 하는 새끼가! 니가 씨발 좆도 모르면서 그렇게 사니까 씨발 그 따위로 사는 거 아냐! 성준택 씨발 니가 봤어? 개소리 좀 하지 마. 다 너 같은 줄 알아?”
“이 새끼 취했네. 야 뭔 말을 그렇게 해. 무영아. 니가 참아라.”
창현이 기석의 등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무영을 말렸다.
“아니 씨발 진짜 말 좆같이 하네 개새끼가! 그럼 니는 존나게 잘난 사무직이라서 구아방 끌고 다니냐? 어디서 차 같지도 않은 거 끌고 다니면서 남 하는 일 가지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럼 씨발놈아 전화해서 와보라고 하면 될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양의 술을 들이켜고 여기저기 욕설을 하면서 반 인사불성의 상태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준택의 연락처를 찾기 위한 무영의 행동양식은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무영은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켜고 고등학교 동창 여러 명을 건너서 성준택의 페이스북과 메일 주소를 확인한 후 이를 다시 구글링하고 집전화와 대조하며 핸드폰번호로 추정되는 번호를 알아내고 이것을 추가해 카카오톡 친구에 성준택을 추가했다. 무영의 행동력은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무영이 핸드폰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야, 봤지? 성준택 010-2647-9945. 나 전화한다. 남기석 니 손모가지 딱 대라.”
침묵 속에서 송신음이 울렸다. 그러나 받는 이는 없었다. 침묵 속에 계속된 거의 여섯 차례의 송신 끝에 무영이 먼저 지쳐 쓰러졌다.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코를 계속 골아 대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계속 붙잡은 채였다. 희명은 무영의 모습이 마치 맥더프 앞의 맥베스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을 노려보던 기석 역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창현은 다리를 크게 들고 혼수상태의 무영을 넘어가야 했다.
“이 새끼들 개같이도 꼴았네. 희명아 이제 일어나자. 택시 불러라.”
희명이 호프집 카운터에 걸려 있던 콜택시 명함을 꺼내서 전화를 거는 사이 창현이 계산을 마쳤다. 얼마나 나왔냐고 묻는 희명에게 창현은 “야, 됐다. 버는 놈이 사야지”라고 대답하고는 기석과 무영의 지갑에서 3만 원씩을 꺼냈다.
곧 콜택시가 도착했다. 희명과 창현은 먼저 기석을 뒷좌석에 구겨 넣었다. 기석은 세상모르고 잠든 채 일어나지 않았고 창현은 기석의 지갑에서 주민등록증과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택시기사에게 넘겼다. 몇 번이나 해 봤는지 여간 익숙한 손놀림이 아니었다. 기석을 실은 택시가 떠나고 또 다른 콜택시가 도착했다. 희명과 창현이 무영을 택시에 구겨 넣으려고 했으나 무영의 거구는 쉽사리 택시에 탑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희명이 왜 자동차는 양옆으로 움직일 수가 없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무영이 외쳤다
“야 가자 가! 가서 보면 되잖아! 아저씨 하이시티 가주세요.”
“아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아저씨 하이시티 아니에요. 야 너 집 어디야?”
“하이시티 간다고 씨발! 가서 보면 될 거 아니야! 이희명 너 타. 타서 하이시티 가자고.”
무영은 다 꼬부라진 소리로 계속해서 하이시티를 외쳐 대고, 희명과 창현은 무영의 거구를 계속 택시에 밀어 넣으려 하고, 택시기사는 차에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쾌하지 않은 소음 속에서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음이 울렸다.
“야 진동 누구 꺼냐?”
“최무영 같은데?”
“야 최무영 전화 받아라.”
무영은 허리춤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전화를 찾아 들고 슬라이딩을 하다 한 번 떨어뜨릴 뻔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술냄새가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질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네. 네. 아 최무영이라고 함다. 준택이 친군데요. 네…. 아 제가 소식을 못 들어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함다.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죄송함다.”
“야 뭐야 성준택 전화야? 뭐래?”
“죽었대. 군대에서 자살했대.”
정적이 흐르고, 택시 문이 닫혔다.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 가운데 택시는 출발했다. 창현은 담배를 물었다. 희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도, 갈 필요도 없는 하이시티의 옥상을 훤히 밝혀 주고 있었다.
- 1‘8월 열광’이란 1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던 1914년 8월경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전쟁당사국에서 벌어진, 전쟁 수행을 지지하던 열광적인 대중의 반응을 말한다. 수 주간 찬전(贊戰)시위와 집회가 벌어졌으며 언론은 과격한 논설을 연일 게재하며 이를 부추겼다. 마침내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연이어 당사국들의 선전포고가 이루어지자, 각국에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자진입대 행렬이 이어졌다.
- 21527년 이탈리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교황군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로마 시를 약탈하고 파괴한 사건. 많은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파괴, 도난 당했으며, 이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라고 평가받는다.
- 31814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상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개최한 빈회의에서,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면 회의를 중단하고 무도회를 여는 행태가 빈발했다. 이에 벨기에의 7대 리니 대공 샤를 조제프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 4앨빈 C. 요크(1887~1964)는 1차 세계대전 당시 1개 분대로 28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132명의 포로를 잡아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던 미국의 군인이다.
- 5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는 소련의 군인이자 군사사상가로, 광정면 동시접촉이론과 충격군을 활용한 종심전투교리를 제안하여 소련의 작전술 체계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 61차 세계대전 당시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된 영국군 42 연대의 병사들은 치마 형태의 하의인 킬트를 입고 싸웠기 때문에 ‘지옥에서 온 숙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 7『타라스 불바』는 우크라이나 작가 고골의 소설로, 17세기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목민이었던 코사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사이의 갈등을 코사크의 족장인 타라스 불바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다.
- 81946년 영국의 역사학자 모리스 돕(1900~1976)이 『자본주의 발전연구』를 발표하자 미국의 역사학자 폴 스위지(1910~2004)가 이를 반박하면서 맑스주의적 역사발전의 성격을 두고 이른바 ‘자본주의 이행논쟁’이 촉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