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예비출판인’이라 하면 꼭 출판사 입사를 지망하는 사람들만 가리킬까요?
굳이 독립출판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이유도 방법도 다양한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기성출판계 밖에서 책을 내려는 예비출판인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많은 동네서점에서 여러 모임을 엽니다.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작가 초청 북토크나 강연회 등입니다. 그중 독립출판 클래스를 열어 ‘출판하는 법’을 알려주는 곳들이 눈에 띕니다. 책을 만들고자 클래스에 참여하는 이들은 명실상부한 예비출판인입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배울까요?
일산 중앙로에 자리한 ‘고메북스’도 책 만들기 수업을 여는 곳 중 하나입니다. 바로 〈고메북스 독립출판 워크숍 – 나만의 책 만들기〉 모임입니다. 4기는 2019년 11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9일까지 두 달 보름 동안 독립출판을 공부하며 책을 냈습니다. 강의는 총 여섯 차례. 마지막 날인 총평 및 피드백을 빼면 다섯 번이네요.
독립출판을 시도하는 이들을 만나고,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도 알고자 워크숍에 등록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을 했으니 혼자 책을 만드는 일은 그렇다 쳐도, 동네서점 워크숍은 처음이라 오히려 낯섭니다.
2019년 11월 9일 _ 수업 안내와 소개, 기획서 쓰기
첫날입니다. 학생은 모두 일곱 명이고, 저 외에는 모두 여성분입니다.
수업은 김초롱 선생님이 진행합니다. 고메북스를 운영하는 정경혜 시인의 시집을 비롯해 여러 책을 앞서 출판해 온 독립출판인입니다.
먼저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왜 클래스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도 한 사람씩 등록했는데, 평소에 써온 글을 직접 책으로 내 보라고 선생님이 독려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한 분은 가죽공예 전문가인데,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만 초보자가 읽기 쉬운 가죽공예책을 쓰고 싶다 합니다. 사실 지난 기수 때 수업을 들었지만 다 완성하지 못해 다시 참여했답니다. 또 어떤 분은 깊이 즐길 만한 자기만의 취미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늘 꿈꾸던 글쓰기를 마지막까지 해 보고자 함께했다고 나눕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지인 손에 이끌려 왔다는 분도 있습니다.
매체는 똑같이 책이더라도 계기와 동기, 목적과 기대는 새삼 모두 다릅니다. 조금 더 유연하다면 출판이 정말 폭넓은 소망을 품는 플랫폼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문득 듭니다.
저도 편않을 소개하고 독립출판을 향한 기대, 그리고 이번 4호 기획을 함께 나눕니다.
뒤이어 선생님이 인쇄, 제본, 홍보나 입고 등 출판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는지 소개합니다. 옵셋 인쇄가 아니라 인디고를 사용한 디지털프린팅으로 책을 만들 계획입니다. 회사에서 책을 만들던 것과는 미묘하게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과제도 있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각자 어떤 책을 어떻게 만들지 기획서를 작성해 와야 합니다. 기획서란 본질적으로 스스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기획서 예시를 보며 함께 공부하고, 어떤 항목이 필요한지 재확인합니다.
저는 기존에 끼적이던 단편소설로 책을 만들 생각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할지 벌써 고민입니다.
2019년 11월 23일 _ 기획 공유, 견본책 만들기
두 번째 수업입니다. 처음보다 한 사람이 줄었습니다.
우선 각 기획을 공유합니다. 2주라는 시간이 출판 기획을 처음 완성하기에는 좀 짧을지도 모릅니다. 문서로 완성해 가져온 사람은 셋뿐입니다. 저도 간단하게 생각만 정리해 써 왔습니다. 무엇보다 원고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컸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쓴 원고라니, 인터넷으로 경쟁도서를 찾고,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홍보전략을 언급하기에 좀 민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사실 어딘가 삐뚤어진 건 아닐까 되돌아봅니다.
제목: 악당들
분야: 소설(범죄소설)
내용 구성: 4~5편 단편집, 같은 배경과 주제를 공유하는 옴니버스식 구성
예상 형태: 120p / 120mm*90mm / 각 장별로 별도 제본
기획의도:
1. 구성 면에서, 독립출판에 어울리는 실험적 소설
2. 내용 면에서, 개념실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지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소설
3. 심심풀이처럼 가볍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예상독자: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젊은 소설 독자층
차별화 요소:
1. 독특한 구성
2. 독립출판에 드문 소설집이라는 점
여섯 사람 중 네 사람이 소설을 쓰겠다고 합니다. 한 분은 평소에 쓰던 에세이를 모으려 구상했고, 다른 한 분은 이미 작업 중이던 가죽공예책을 계속 만든다 합니다. 독립출판에서는 만나기도 어렵고 많이 나가지도 않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많아 도전적입니다. 각자 서로 기획한 내용을 피드백하고, 책을 만들 때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지 이야기합니다.
기획은 점차 더 구체화해 나가도록 하고, 견본책 만드는 법을 배웁니다. 먼저 판형을 확정하고 자기 책이 몇 페이지나 나올지 예상합니다. 기획에 맞는 내지 사이즈의 종이를 해당 페이지만큼 모아, 간단히 디자인한 표지로 감쌉니다. 이렇게 책 꼴만 만들어 완성될 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합니다. 견본책으로는 대략적인 두께나 크기, 무게감, 질감, 폰트의 적합함 등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과제는 견본책 만들기, 원고 완성하기. 다음 시간부터는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로 디자인을 시작합니다. 내지 편집디자인이야 많이 했지만, 퍼블리셔로 책을 만드는 건 처음입니다.
2019년 12월 7일 _ 견본책 공유, 표지 및 본문디자인 하기
세 번째 수업입니다. 커리큘럼이 느슨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과제 따라가기도 힘듭니다.
원고를 완성하느라 결국 견본책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게으른 꼴이 된 듯하여 부끄러웠는데 다른 분들도 원고를 완성하기에 시간이 쫓겼던 모양입니다. 한편 중학생 수강자는 진작 원고도 거의 완성했고 기획서도 꼼꼼하더니, 표지며 굿즈까지 구상해 왔습니다.
수업 내용은 내지 및 표지 디자인입니다. 자세한 디자인 요령을 배우는 건 아닙니다. 원하는 판형에 따라 디지털 데이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여백을 왜, 얼마나 두고 작업해야 하는지, 표지를 만들 때 날개, 앞・뒤표지, 책등 등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원래 견본책을 보며 내지 디자인을 구체화해야 하지만, 머릿속으로 완성된 책을 상상하며 작업합니다. 작업하며 처음 구상했던 제목, 판형, 두께 등을 이것저것 바꿉니다.
퍼블리셔에 적응하는 데에만 한참 걸립니다. 퍼블리셔는 단행본보다는 소책자나 브로슈어 제작에 특화된 툴입니다. 하지만 파워포인트와 비슷한 점이 많아, 일단 익숙해지자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도 다들 금방 적응해 자기 책을 뚝딱뚝딱 디자인합니다.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아 낯선 프로그램 다루기 어렵진 않을지 내심 염려했던 모습이 깊이 부끄럽습니다.
과제는 다음 시간까지 디지털 파일 완성해 오기. 표지와 본문을 모두 작업해 와야 합니다. 원고를 쓰고, 교정하고, 디자인하는 것까지 한 달 반에 완료하는 셈입니다. 이제 보니, 수업 자체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정은 꽤 빡빡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2019년 12월 28일 _ 가제본 만들기
네 번째 수업입니다. 오늘은 몇 분이 못 와서 네 사람뿐입니다.
오늘 핵심 목표는 가제본 주문입니다. 가제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제본까지 한 책을 한 권만 주문해 받아 보는 일입니다. 대량으로 인쇄하기 전에 한 권을 먼저 인쇄해 보고 수정할 부분은 있는지, 파일에 생각지 못한 오류는 없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완성한 책을 이렇게 한 권만 받아 볼 수 있다니, 디지털프린팅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추천하는 사이트, 주문 방법 등을 세세하게 알려 줍니다. 인디고 출력입니다. 힘들게 견적서를 받고 인쇄소와 연락할 필요도 없이, 인터넷으로 재원 등을 입력하고 데이터 파일을 업로드하니 끝입니다.
내지 및 표지 디자인을 완료하지 못해 우선 작업을 진행합니다. 다행히 디자인은 어찌어찌 끝냈지만, 오늘 가제본을 주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한편 출판계에서처럼 은어가 많이 오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면서도 신선합니다. 책등은 ‘세네카’라 부르지만, ‘하시라’나 ‘도비라’라는 이름은 쓰지 않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과 그 전문성에 은어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2020년 1월 4일 _ 가제본 공유, 입고 및 홍보하기
다섯 번째 수업입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오늘로 끝납니다.
우선 가제본을 서로 피드백하며 완성도를 높입니다. 저도 아슬아슬하게 배송 받은 가제본을 공유합니다. 서로 가제본을 보며 피드백하는 내용이 생각 이상으로 날카롭습니다. 제게도 본문 내지가 두꺼워 넘기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원고가 기대보다 얇아 내지를 좀 두꺼운 종이로 선택했는데, 역시나 얄팍한 눈속임 꼴이었습니다.
각자 책을 두고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문득 의아합니다. 출판계는 늘 편집자가 전문적 기술을 가진 업이라 이야기하지만, 이제 첫 책을 만드는 이들의 고민과 지적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교정 능력 외에 어떤 면에서 전문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기존에 하던 일을 잘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모험적 시도를 하면서 출판의 경계를 넓혀야 비로소 전문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뒤이어 책을 어떻게 입고하고 홍보할지 공유합니다. 출판사로 치면 보도자료를 쓰는 일인데, 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다들 ISBN을 받지 않았으므로, 독립서점에 입고메일을 돌려야 합니다. 저로서는 「편않」을 네 차례 만들면서 가장 자신이 붙은 일입니다. 선생님은 책을 소개하는 자료를 만드는 법, 입고메일을 쓰는 법 등을 경험에 비추며 소개합니다.
저는 책 완성도가 낮아 우선 입고며 홍보를 미룹니다. 지나치게 얇은 원고를 우선 더 보강하고, 내지 디자인도 더 읽기 쉽게 바꿔야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 책을 내보내려니 당장 자존심에 걸립니다.
2020년 1월 18일 _ 뒤풀이
마지막 날. 수업이라기보다는 서로 소감을 나누고 격려하는 시간입니다.
맛있는 음식, 따듯한 차, 즐거운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자기만의 책’을 만든 이들에게서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엿보입니다. 얼마나 팔리는지 아닌지를 떠나, 자기 이야기를 누군가 읽어 줄 통로를 직접 만들었으니까요.
고메북스는 아트마켓을 열어 워크숍 참여자들의 책을 사람들과 공유할 예정입니다. 또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한다면 워크숍 학생들도 함께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메북스 독립출판 워크숍 4기 분들은 예비출판인일까요, 출판인일까요?
워크숍 참여자들에게 연락처를 드립니다. 다음에 또 글을 쓰고 싶은데 쉽게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언제든 연락주시라고 부탁드립니다. 역시 저는 저자라기보다는 편집자입니다. 제 글을 소개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빛나게, 더 잘 드러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런 일에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드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게 책은 상품이지만, 그에 앞서 저자에게는 자기표현입니다. 그래서 출판사는 수익성이 검증된 기존 모델을 주로 따라가고, 저자들은 다양한 자신을 그대로 표현할 방법을 독립출판에서 찾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편, 워크숍 내용이 생각 이상으로 쉬웠던 점도 되새길 부분입니다. 강의가 복잡하고 어렵지 않아도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종류의 책이 그렇진 않지만, 좋은 책을 만드는 데에 꼭 많은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출판인이 추구해야 할 전문성이란 무엇일까요? 또 예비출판인이 출판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함께 워크숍을 한 이들과 다시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며, 이렇게 클래스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