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우
이것은 ○○이/가 아니다: 책 읽는 영화기자 그리고 영화 보는 편집자
영화기자 손정빈과 편집자 김윤우가 서로에게 추천받은 영화와 책을 감상하고, 서평과 리뷰를(혹은 서평과 리뷰가 아닌 것을) 씁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편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3월부터 12월까지, 두 명의 필자가 격월로 매월 마지막 날 연재합니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곡이 생겨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찬찬히 들어 보려고 했다가, 검색 결과로 나오는 엄청난 목록에 압도당한 적이 있다. 제목은 똑같은데 끝에 붙는 번호가 달라서, 비슷한 것 같은데 미묘하게 듣고 싶은 곡이 아닌 엉뚱한 곡들만 줄창 듣고 결국 못 들은 적이 있다. 듣고 싶은 곡이 몇 번인지(혹은 무슨 조성? 작품번호?인지……) 겨우 알아내도 곡들의 제목이 너무 긴 탓에 제목이 끝까지 나오기를(스크린에서 흐르기를) 기다리다가……속이 터질 뻔하기도 했다. 음반의 재킷 이미지들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면 그냥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다행히도 〈타르〉는 음악(클래식) 영화가 아니었다. 〈타르〉는 권력에 대한, 그리고 크리스타(Krista)가 ‘위험한(at risk)’으로 재배열(애너그램)되듯이, 견고해 보이던 권력을 조각조각 내는 영화였다. 영화의 첫 시작부터 경력의 정점에 이미 올라 있던 리디아 타르가 추락하는 이야기였다.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어떠한지) 잘 모르는 나 같은 관객을 위해서 이 영화는 초반에 타르의 권력을 인터뷰 신으로, 또 강의 신(특히 연기 차력쇼 같은 이 강의 신은 다른 형식으로 두 번 반복된다)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소리와 시간을 가지고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타르는 길고 긴 인터뷰 신의 대사로 이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인터뷰어가 지휘자의 역할을 메트로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며 현대 지휘자의 권위를 은근히 의심)하자, 타르는 음악을 시작하는 것, 음악이 진행하는 방식, 그리고 끝나는 시점까지 그 시간을 장악한 사람이 바로 지휘자라고 설명한다(권위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킨다). 청중은 지휘자가 해석하는 대로 음악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타르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사랑’으로 해석하면, 청중은 그렇게 들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빠고 지휘자이고 신이다. 무엇을 어떻게 들을지 결정하는 것은) 나다.”
(재미있게도 지휘자의 권력에 대한 이 설명은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자리에 가만히, 또 조용히 똑바로 앞을 향해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2시간 정도 감독이 만든 작품을 그 작품의 호흡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 나는 이것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이자 재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겠다.)
영화는 타르의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을 다루면서 중간중간에 타르가 그 권력을 어떻게 얻었고 유지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타르는 평범한 이름은 멋스럽게 바꾸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렸고, 잘못 쓴 점수표는 지우개로 지워 왔고, 어린아이라도 윽박질렀고,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틈을 주지 않았고, 거짓말을 해 왔다. 타르는 로버트 그린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권력의 법칙』에 나오는 48가지 법칙들(예: Law 6 무슨 수를 쓰든 관심을 끌어라: 루머와 신비화 전략, Law 27 어느 누구에게도 헌신하지 마라: 관계의 기술, Law 38 일은 남에게 시키고 명예는 당신이 차지하라: 성과 가로채기 등)을 전부 마스터한 사람 같다.
(출판사가 뽑은 표지의 카피에 따르면) 20개 언어로 번역되고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이 책은 읽기만 하면 (나도)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매우 지루한데, 48가지 법칙을 다 마스터해서 권력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가(뭐가 좋은가) 하는 질문은 다루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영화 〈타르〉는 권력을 획득한 이후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세계는 아주 납작하다.
권력을 쥔 사람은, 시간을 장악하는 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거장의 자리를 노리는 마에스트‘로’의 자리에 있는 타르는 세상을 납작하게 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인간들보다 저 높은 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르는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도, 성적 소수자로서 받는 차별도 없다는 듯이 산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이고 그런 정체성이 경력에 장애물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고 타르는 단언한다.그러나 타르가 완성하여 끝내 클래식 음악의 세계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말러 5번을, 이 영화는 단 한 번도 온전히 감상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대신, 그러니까 권력자를 조명하거나 그 권위를 다루는 대신, 이 영화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흐르는 스태프롤이 등장할 때에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에 들리는 마지막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우주선에 타면, 뒤로 갈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갈 것이다. 게임 캐릭터들의 의상을 입은 채 관객석을 채운 어린 관객들의 모습이 지나가고 클래식을 다루는 영화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강한 비트의 음악이 흐를 때, 관객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지루한 세계를 내려다보는 타르의 모습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타르의 권력에 염증을 느끼는 프란체스카, 모두에게 연필을 쥐어 주고 싶다고 말한 페트라, 지휘자의 이름은 까먹고 첼로를 유튜브로 공부한 올가 등 그 권력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사람들이다. (2023/3/31)
김윤우 | 출판공동체 편않에서 기획 및 편집 등을 맡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