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알람 이두루 edited by 지다율
2022년 연말, 사무실 발난로 앞에 위태로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 아는 중견 출판사 세 곳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다가, 그 출판사의 책들이 어디로 갈지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올해 1월에 받은 메일들을 열어 보았다. 새해가 밝자마자 직거래하던 독립서점 몇 곳이 폐점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도착했었다. 위탁판매로 입고해 두었던 책을 반품받을 주소를 메일 회신에 적어 넣으면서, 어떤 마음을 전할지 고민했다.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으나 많고 많은 정성으로 꾸려 왔을 책의 공간을 스스로 단념하게 된 동지들께 무슨 말로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
페미니즘 출판사를 시작한 지 7년, 보람도 기쁨도 많았지만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켜켜이 쌓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판매의 한계도 느꼈고, 특히 백래시가 준 좌절이 작지 않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2016)는 외침을 시작으로 동시대 여성들의 경험에 힘을 싣는 책들을 내 왔건만, 그렇게 수년간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만들어 온 변화와 생각들이 유치하게 찍어 눌러졌다. ‘반페미니즘’의 언어들은 해괴하고 우스웠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기득권의 무지성이 그 자체로 권력의 증명임을 아득하게 깨달아 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많은 여성이 점점 말하기를 포기하고 울적한 침묵에 잠기는 듯했다. 차별의 현실을 첨예하게 직시하던 독자들의 목소리가 옅어져 가자 페미니즘 출판업자는 고독해졌다. 어둠 속에 씨를 뿌리듯 책으로 계속 이야기를 발신했다. 혐오와 백래시가 무자비해도 ‘우리 절대 곱게 져 주지 말자’고 의지를 다졌고(김진아, 『곱게 지지 말기로 해』, 2021) 일상을 깎아 가면서 n번방 범죄자들의 재판을 추적해 온 시민들의 위대한 분투기를 전했으며(팀 eNd, 『그래서 우리는 법원으로 갔다』, 2022) 고통스러웠던 대선 이후의 시간을 사는 우리를 위한 통렬한 편지들을 출판했다(정소영, 『감옥으로부터의 소영』, 2022). 그러나 과연 이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알 수 없었다.
침묵을 떨치기 위해서는 일상과는 다른 공간이 필요했다. 올해 나를 떠들게 한 것은 6월과 10월에 열린 두 차례의 북페어였다. 서울 국제도서전과 서울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직접 책을 팔러 나섰다. 판매 부스에 여태 출간한 20여 종의 책을 야무지게 설치했다. 놀랍게도 정말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다. 저마다의 책에 제각각의 이유로 흥미를 갖는 사람들의 수백 가지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독자를 만나고 책을 소개하고 리뷰를 듣는 일에 그토록 목말라 있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영화 〈그래비티〉(2013)의 주인공이 무중력의 우주에서 마침내 지구로 돌아왔을 때처럼, 좌표를 잃어 가던 마음이 오랜만에 단단한 중력을 만났다. 일 년 내내 한 것보다 도서전 매대에 서 있던 며칠간 더 많은 말을 했다. 2022년이 동지들의 폐업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한 해가 아닐 수 있었던 건 여기서 만난 얼굴들의 기억 덕분이다.
발난로 앞에 웅크린 몸뚱이를 일으켜 피아노 독주회에 다녀왔다. 처음 듣는 곡들로 이루어진 90여 분의 연주에서 전율할 만큼 좋은 60초를 발견하는 기쁨은 내 일과 닮았다. 백수십 날을 고심해 만든 책의 첫 감상을 듣는 하루, 수백 쪽짜리 원고에서 뜻밖의 표현들이 기발하게 이어지는 몇 줄을 읽는 쾌감. 이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 기꺼이 성실하게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를, 다시 어느 곳에서든 응답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내년에도 후년에도, 바라건대 폐업하는 일 없이.
이두루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