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완규 edited by 김윤우
10대 후반. 국사·세계사 시간이 제일 재밌었다. 자연스레 인문대 사학과에 진학했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으나, 1985년 입학식 때부터 시위에 참여. 학교 밖 활동에 힘썼다. 한참 잊고 있던 역사·서양사 공부를 하고 싶어 국비유학생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세상에서 내가 할 것이 없구나.’ 1년 동안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김수영·최승자의 시, 철학사, 역사책 등.
빨간 펜을 잡을 수 있었다
10대 후반. 국사·세계사 시간이 제일 재밌었다. 자연스레 인문대 사학과에 진학했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으나, 1985년 입학식 때부터 시위에 참여. 학교 밖 활동에 힘썼다. 한참 잊고 있던 역사·서양사 공부를 하고 싶어 국비유학생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세상에서 내가 할 것이 없구나.’ 1년 동안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김수영·최승자의 시, 철학사, 역사책 등.
밝은 빛이 싫었다. 선배가 ‘출판사’라는 데가 있다고 했다. 출판사? 책? 서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서점과 책이었다. 한여름 뚜벅뚜벅 신사역 근처를 걸어가는데, 5층짜리 서점이 있었다. 입구에 붙은 ‘알바 급구’를 보자마자 ‘그냥’ 들어갔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지하 입고실에 들어온 책을 매장에 올리고, 지하로 내려온 반품용 책을 싸서 보내는 일이었다. 6개월 정도 했다. 서점에 비치된 출판 정보지, 여러 출판사의 도서목록, 신간 홍보물 등을 마구마구 모았다. 비오는 날 저녁, ‘편집부 직원 구함’이란 문구 발견. 사회과학 출판사였다.
“책이 어떻게 독자의 손에 들어가는지 말씀해 보세요.” 다큐처럼 리얼하게 답했다. 추가로 이어진 몇 가지 질문. 한국사회에 대한 생각, 맞춤법, 교정 등이었다. “저 잘해요, 할 줄 압니다(할 줄 몰랐다. 테스트했다면 입사 불가였다).” 준비 없이 편집자가 되었다. 1993년 여름이었다.
입사 일주일이 지난 즈음 편집장님이 나에게 프린트를 주었다. 첫 장에 ‘노동자를 위한 예술 강의’라 씌어 있었다. 에셔, 마그리트의 그림을 처음 보았다.
빨간 펜을 들었다. 편집장님이 손짓했다. “왜 빨간 펜을 드는 거야? 연필로 열 페이지 교정과 교열을 본 뒤 가져오세요.” 열 장을 드렸다. 종이를 넘기기 시작. 30초도 지나지 않아, 종이 뭉치를 나에게 던졌다. “너 할 수 있는 게 뭐야!”
쪽팔렸다. 출근하기 싫었다. 고민했다. 그만둘까? 흩날리는 종이를 주우며 처음으로 문장 공부를 시작했다. 불면의 시간이었다. 새벽에 컴퓨터를 배우고, 일과 후에는 한글 강의를 들었다. 세 달이 지날 즈음 편집장님이 내 책상에 메모를 남겼다. “이제 빨간 펜으로 일하세요.”
그 사이 신인 저자는 독일로 유학 갔다. PC통신 초기. 소통은 목소리가 아닌 전화벨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국제전화벨이 한 번 울리고 끊기면 ‘원고를 보냈음’, 두 번 울리고 멈추면 ‘저자 오케이’. 여섯 달이 지난 뒤 어시스턴트로 참여한 ‘노동자를 위한 예술 강의’가 책이 되었다. 『미학 오디세이 1·2』. 그로부터 10년 후 『미학 오디세이 3』의 책임편집자가 되었고, 진중권 선생님과 함께 이 시리즈를 완간했다.
흩날리던 교정지를 주우며 이룬 빨간 펜의 소망! 여하튼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완규 | 1993년 출판사 입사, 현 26년 차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