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edited by 김윤우
일하러 나가는 엄마는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갈 나에게 8칸짜리 공책과 연필을 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데렐라』를 따라서 글씨를 써 보라고. 신이 난 나는 그날 꼼짝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퇴근한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공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깔깔깔!” 난데없이 터진 엄마의 웃음소리에 귀가 떨어질 뻔했다. 문장부호, 띄어쓰기도 없이 그리기만 한 글씨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다음 날에 엄마는 10칸짜리 공책을 새로 사다 주었다. 그렇게 나와 한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수학이 너무 싫어서 문과를 택했고, 불어불문학 전공을 했다. 3학년쯤 되니 친구들은 공무원 수험서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제 붙을지 모를 끝없는 줄 끝에 서고 싶지 않았다. 취업 스터디를 들어갔다. ‘전공 불문’이라는 말에 용기를 갖고 지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공계 스터디 멤버들이 면접 경험을 쌓는 동안 나는 24년 인생 자체에 대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업 스터디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교 휴게실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중 광고를 봤다. “책이 밥 먹여 주냐고요? 네, 밥 먹여 줍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한 카피가 아닐 수 없는데, 내게는 책과 밥이 정말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SBI 2기를 뽑는다는 광고였다. 그 광고 하나로 SBI에 지원해 처음으로 면접을 보았고, 우여곡절 끝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서울 합정에 있다는 SBI를 다니기 위해 고양시 화정에 사는 작은이모 집에 잠시 얹혀살기로 했는데 복병은 아빠였다. “안 가면 안 되냐? 여기서 공무원 하다가 시집가면 얼마나 좋아?” 나는 기가 막혀서 목이 메었다. “아빠, 나는 공무원 진짜 싫어요.” 사실 지금도 공무원의 업무는 잘 모른다. 그저 안정적이라는 말로 한창의 나이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아 도망쳤을 뿐.
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내가 꿈꾸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순 반복 업무보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나의 흥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박봉이라고 하지만 나의 일을 사랑하면서 얻는 만족감이 클 것 같았다(월급이 안 나올 줄은 몰랐지). 대부분 작은 규모의 회사라고 하지만 그래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귀여움을 받는 신입사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가족’의 함정을 그땐 몰랐지).
다이내믹 출판 인생. 소박한 꿈을 안고 6개월간 SBI 교육 이수 후 첫 직장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관절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은 | 2007년 출판사 입사, 현 13년 차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