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A는 더 이상 편집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여기서는 A가 원하는 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 입고된 신간 표지에는 급박한 일정 속에서 얼굴 한 번 못 본 저자의 이름이 찍혀 있었습니다.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 모든 순간이 A의 일이었지만, 만든 책 어디에도 A는 없었습니다. 지친 눈의 선배들은 사명감으로 일해라, 책에 애정을 가져라 하고 말했지만, 그건 자신이 만들 책이 좋은 책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마케터 B는 무의미한 노력에 지쳤습니다. 결국 가장 구석진 서가에 꽂힌 신간을 보며 한숨만 지었습니다. 서점 담당자를 설득하려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책을 기획해야 한다는 걸 B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참한 매출현황표 어디에도 B가 흘린 땀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장님의 취향에만 맞는 책을 팔며 회의감에 젖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습니다. 반품과 신간이 뒤섞여 어지러운 물류창고에서 잔업을 하다 보니 벌써 저녁입니다. 오늘도 막차를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C는 책을 망치는 참견들이 지긋지긋했습니다. 이 디자인은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한 거예요, 라는 말이 매일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갑니다.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고 싶다는 바람은 오래전에 접었습니다. 작업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수룩해지는 책의 몰골을 보며, 신간 간기면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고 C는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낡은 취향을 기계처럼 그려 줄 도구였습니다.
작가 D는 그저 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는 말끝마다 트렌드가 어떻고, 팔리려면 어떻고 하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해줬다면, 저자 할인가로 드리니 많이 좀 사 달라고 했을 때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책을 낼 때마다 표지에 붙은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번 신간도 마치 D의 책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독립출판도 자비출판업체도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시간에 글을 더 쓰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독자 Z는 결국 책이 읽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A부터 Z까지는 지금까지의 편집을 때려치우기로 했습니다. 책에 담기 위해 내용의 본질을 훼손하는 편집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책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편집을 할 수 있고, 또한 편집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함부로 편집하지 않는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편집은 때려치웠지만 책은 때려치우지 못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A부터 Z까지, 책 속에 숨은 모든 사람이 이제 편않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