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

김종빈 edited by 김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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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화면

어두운 화면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화면은 빛줄기를 따라 움직인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 공간이 빠르게 흐르며 주마등처럼 지석과 관련한 데이터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지석의 이름, 1,549개의 연락처, 하루 평균 20건이 넘는 통화 기록, 주로 광고가 많은 문자 메시지, 받은 메일함과 보낸 메일함, 임시 저장함, 건강 및 의료정보(키, 몸무게, 혈액형, 걸음 수, 수면 시간 등), 여러 웹 링크가 파편적으로 저장된 메모,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힌 캘린더 등이 흐른다. 사진과 동영상이 뒤를 잇는다. 연인과 찍은 사진이 반, 핸드폰 화면을 캡쳐한 이미지가 반이다. 가끔 생일파티 영상 등이 등장한다.

화면 너머로 뉴스의 앵커 목소리(“오늘 코스피는 어제보다 30.54포인트, 1.42% 오른…”)와 헬스 유튜버 목소리(“바쁜 회사원을 위한 운동법! 많은 분들이 직장 다니면서 어떻게 운동~”)가 뒤섞여 흘러나온다. 맑고 또렷하게 “네, 그 시간에 깨워 드릴게요”라고 하는 시리(Siri)의 목소리가 울리고, “카톡, 카톡” 소리가 환청처럼 이어진다.

블랙홀의 끝에 다다르자 지구 깊이 존재하는 핵처럼 활활 타오르는 둥근 원형이 나타난다. 파랗게 타오르고 있다. 파란 원형이 지석의 핸드폰 잠금화면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2. 지석의 오피스텔 / 이른 아침

핸드폰 잠금화면에는 지석(32세, 남)의 연인 도희의 얼굴이 떠 있고 그 위로 디지털시계가 있다. 6시 59분에서 7시 00분으로 시간이 바뀌자마자 시끄러운 알람이 울린다. 휴대폰 알람 소리가 들려도 침대에 걸쳐진 듯 누워 일어나지 않는 지석. 손에 핸드폰을 쥐고 눈을 감고 있다가, 알람이 계속되자 지석의 퉁퉁 부은 눈이 겨우 떠진다.

지석 하~이씨!

시간을 확인한 지석은 알람을 끄고 강시가 관 속에서 휙 일어나듯 무거웠던 몸을 벌떡 일으킨다. 서류가 가득 담긴 가방을 탁자 위에 던져 놓고 화장실로 직행한다. 부산스럽게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대충 말린다. 안경을 쓰고, 셔츠에 팔을 집어넣고, 바지를 깽깽이걸음으로 입는다. 냉장고를 연다. 이곳저곳으로 눈동자를 빠르게 돌리다가 다시 닫는다. 잠시 후 다시 열어 엎어져 있던 초코우유를 챙긴다. 어느새 입에는 식빵 한 조각을 물고 있다.

지석은 바쁘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다가, 멈칫한다. 고민하지 않고 신발을 신은 발이 방바닥에 닿지 않도록 무릎으로 탁자까지 기어간다. 온갖 물건으로 어지러운 탁자 위에서 보조배터리를 빠르게 집어 가방 앞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3.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지하철역 / 이른 아침

거북목으로 핸드폰 화면에만 집중하는 지석.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려도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탄다. 닫힘 버튼을 스트리트파이터 초필살기 콤보 쓰듯 연타로 눌러 댄다. 엘리베이터 문은 천천히 닫힌다. 몇 초 후 문이 다시 열리면서 등장하는 지석의 모습. 지하철 문이다. 지석은 지하철에 탑승한다. 이때까지 지석의 손에서는 핸드폰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4. 지하철 / 이른 아침

지하철에서도 지석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핸드폰 화면에는 인스타그램 피드가 떠 있다. 지석은 숙제라도 하듯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며 인스타그램의 모든 게시물을 엄지로 빠르게 두 번씩 터치한다. 화면에서 끊임없이 깜빡이는 하트.

점점 줌 아웃 하면 지하철 속 가득 찬 승객들이 화면으로 들어온다. 모두 지석과 비슷한 모습으로 각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5. 사무실 / 아침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지석이 전화를 받으며 들어온다. 어느새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있다. 눈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고정하고 있다.

지석 지금 열심히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럼요. 예예, 걱정 마십시오. 좋은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전화가 끝나도 지석은 핸드폰 화면을 본 채 앞을 보지도 않고 사무실 복도를 지난다. 앞을 보지 않지만 용케 자기 자리까지 도착한다. 자리에 도착한 그는 발을 이용해 의자를 꺼낸다. 그러나 앉는 것을 잊어버린 듯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어정쩡하게 서 있다. 걸어 다니는 구두 소리, 사무실 전화벨 소리, 직원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소리, 복사기에서 용지 나오는 소리 등 주변 소리가 차츰 멍멍해지듯 조용해진다. 대신,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의 도착음, 발송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지석의 후배, 철언(31세, 남)이 불쑥 등장한다. 철언이 지석에게 뭐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만 뻥긋뻥긋한다. 지석의 동공은 빠른 속도로 좌우상하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철언을 보지 못하고, 소리도 듣지 못한다. 여전히 각종 핸드폰 소리만 듣고 있다.

철언 (선배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지석에게서 전혀 반응이 없다. 철언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금 더 크게 지석을 부른다.

철언 (선배님!)

지석 …….

철언 지석 선배님!

철언의 말과 동시에 갑자기 주변 소음이 지석에게로 쏟아진다. 그제야 정신 차린 지석은 고개를 들어 철언을 보고, 귀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뺀다.

지석 (어색한 웃음) 어, 철언 씨!

철언 (씩 웃으며) 곧 회의 시작하는데 들어가시나요?

지석 어? 어…. 그래야지. 정리 좀 하고 들어갈게.

철언 (손목시계를 보며) 저는 오늘 외근이라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요청하신 자료, 문자로 보냈는데 보셨어요?

지석은 철언과의 대화에 빠르게 흥미를 잃은 듯 핸드폰 화면을 다시 바라본다.

지석 (건성으로) 어? 어…. 확인해 볼게.

철언은 전할 건 다 전했으니 임무는 다했단 표정으로 짓고, 화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바로 다시 들어온다.

철언 아, 그리고 선배님. 핸드폰 보조배터리 있으시죠? 저 바로 나가 봐야 하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좀 빌려 가도 될까요?

지석은 살짝 고개를 들어 철언을 바라본다. 조금 찜찜한 표정.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핸드폰에 두 눈을 꽂고 한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 앞주머니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낸다.

지석 나도 오늘은 하나만 가져왔으니까 퇴근 전에는 갖다 놓고.

보조배터리를 든 지석의 손이 철언의 손에 정확히 도달하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허공을 몇 번 헤맨다. 철언은 알아서 배터리를 건네받는다. 지석이 핸드폰에 빠져 있는 모습을 힐끔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6. 사무실 / 아침

지석은 그제야 의자에 앉는다. 마치 눈이 어두운 사람처럼 엉거주춤 의자에 앉고는 아무 대사 없이 꽤 오랫동안 핸드폰만 바라본다. 움직임도 없다. 마치 정지화면 같다. 이윽고 목이 아픈지 목을 풀다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본다.

지석 음? 하하. 이게 펀드매니저의 일상이죠.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니까요. 어제도 몇 시야…. 12시 반인가? 아무튼 야근하고 택시 타고 들어가고….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핸드폰은 항상 달고 다녀야 하고…. 정신이 진짜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남들 돈을 불려 줘야 하는 직업이라…. 에효, 내 코가 석 잔데, 뭐래. 그놈의 로우 리스크에 하이 리턴…. 응? 잠시만요.

지석에게 전화가 온다.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다.

지석 여보세….

(전화 속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여론조사 전문기관 투데이 리서치입니다. 바쁘시더라도 귀하의 협조가….

두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석은 전화를 끊는다. 이 와중에 쓸데없는 전화까지 오자 성가시다는 표정.

지석 (약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조금 밝은 표정으로) 아참, 그나저나 제 소개도 안 했네요? 제 이름은….

팀장 최곤대 손지석!

#7. 사무실 / 아침

지석이 돌아보자 화면의 앵글도 돌아간다. 부장실 문이 벌컥 열려 있고, 문 앞에 뿔이 난 채로 서 있는 팀장 최곤대(42세, 남)가 보인다. 최곤대는 성큼성큼 지석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쏘아붙인다.

팀장 최곤대 플러스 여력 안 나오는 거 확인 제대로 했어, 안 했어?

지석 아, 예. 그거… 확인하긴 했는데….

팀장 최곤대 성장 못 한다는 가정까지 시나리오 꼼꼼히 짜서 알려 줘야 고객에게 신뢰가 가지! 어닝이 실현될 수 있는지 없는지, 변수 다섯 가지 이상 분석해서 메일로 다시 보내! 쯧!

지석 아, 네. 미팅 후에 확인해서 바로 보내겠습니다!

팀장 최곤대 그리고 어제 새벽에 내가 보낸 문자에 바로바로 답변 안 해?

지석 아….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어제 폰에 신경은 쓰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오늘 아침에 확인하고 고객님께 연락 드렸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팀장 최곤대 (말을 자르며) 요즘 돌아가는 상황 알고는 있는 거야? 웃을 일 일절 없는 거 알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알아들어? 윗선에서 나한테 얼마나 압박을 가하는지는 알아? 내가 너 쉴드 쳐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런 시기에 빠릿빠릿하게 굴지 않으면….

핏대까지 세우며 큰소리를 내는 팀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지석. 팀장의 목소리가 점점 개 짖는 소리처럼 들린다. 팀장의 침이 지석의 얼굴, 안경, 쥐고 있던 핸드폰에 거침없이 튀긴다.

팀장 최곤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시 대기하고 있어! 어?

팀장이 잔소리를 퍼붓고 떠난다. 지석은 얼빠진 표정으로 안경 닦는 손수건을 꺼낸다. 그리고 핸드폰에 묻은 침을 안경에 묻은 침보다 먼저 닦는다. 손길이 조심스럽다. 그때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한다. “카톡!”

여자친구 도희다. 카카오톡 어플을 여는 지석. 도희 외에도 다른 이들에게서 온 메시지가 잔뜩 떠 있다. 〔도희: 오늘 7시에 레스토랑 알지?〕 지석은 답장을 보낸다. 무표정이다. 〔지석: 고롬! 오늘 5주년 기념일!!(하트)(하트)〕 〔늦지 않고 갈게!〕 이어 귀여운 이모티콘을 빠르게 눌러 보낸다. 도희의 답장도 빠르다. 〔도희: 응응!〕 〔저번처럼 늦지 말구~~〕 〔지석: 알겠엏ㅎㅎㅎ〕 〔근데나 이제 회의 가야겠다〕 〔이따 퇴근하고 출발할때 연락할게!〕

지석은 회의에 필요한 물건들을 재빠르게 손으로 챙긴다. 의자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걸어간다. 지석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벽에 달린 시계를 클로즈업한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점점 빠르게 돌아간다.

#8. 사무실 / 오후

바쁜 지석.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종이 뭉치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다가 복사기로 뛰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순간도 핸드폰을 놓지 않는다.

#9. 사무실 / 저녁

“카톡!” “카톡!” 날 선 소리로 카톡 알림이 울린다. 핸드폰을 보니 도희의 카톡이다. [도희: 어디쯤이야?] [나 먼저 도착했어ㅎ.ㅎ] [..오고 있지?] 6시 50분! 시계와 지석의 표정, 번갈아 가며 교차 편집.

지석(na.) 회사에서 레스토랑까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 역까지는 뛰어서 5분. 레스토랑은 역 바로 근처니까 지금부터 미친 듯이 뛰어가면 10분 컷 가능하다.

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눈썹을 치켜올린 지석은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한다.

지석 택시요? 지금 이 시간에 타면 한 시간 걸려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석. 가방을 들고 바로 회사 밖으로 뛰어나간다.

곧이어 철언이 지석이 달려 나간 방향을 보며 들어온다. ‘뭐가 저리 바쁘시지?’ 철언은 지석의 빈자리로 다가간다. 책상 위에 캔 커피와 보조배터리를 내려놓는다. 배터리에는 “잘 썼습니다”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10. 자료화면—핸드폰 속 원형

핸드폰 속 원형이 잠깐 보인다. 원형은 지석의 심장처럼 조금씩 빠르게 뛴다. 조금씩 달궈진다.

#11. 지하철역 / 저녁

지하철역에 도착한 지석. 많은 사람 가운데서 숨을 몰아쉰다.

안내방송 지금 구파발, 구파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The train for Gupabal is approaching.

다행히도 지하철이 바로 들어온다. ‘늦지 않겠다’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핸드폰을 본다. 그런데, 배터리의 잔량이 1%뿐이다.

지석 어? 뭐야? 좀 아까는 충분히 충전돼 있었는데?

늘 그렇듯 가방에 보조배터리가 있을 거라 생각한 지석은 가방 앞주머니를 더듬는다. 그런데, 없다. 가방을 샅샅이 뒤진다. 없다. 그제야 오전에 철언에게 빌려줬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아연실색하는 지석.

안내방송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립니다.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사람들이 내리고 탄다. 지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안내방송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망설이던 그는 발걸음을 돌려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천천히 걷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1%밖에 생명이 남지 않은 핸드폰으로 도희에게 전화를 건다.

지석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도희)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지석 아무 대답하지 말고 잘 들어! 나 좀 늦는다! 이제 곧 끊어질 거야! 도착하면 설명할….

핸드폰이 꺼지면서 전화가 끊어진다. 지석은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달리기 시작한다.

#12. 레스토랑 / 저녁

도희 오빠? 여보세요? 여보세….

도희(31세, 여),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몇 명의 사람들이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도희는 맞은편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미 몇 번씩 읽은 메뉴판을 다시 떠들어 본다. 빈 잔을 발견한 웨이터(30세, 여)가 도희에게 다가온다.

웨이터 한 잔 더 따라 드릴까요?

도희 아, 고맙습니다.

웨이터가 물을 다 따르고 묵례를 보낸 뒤 자리를 떠나자마자, 도희는 물을 들이켠다.

#13. 회사 엘리베이터 / 저녁

완전히 꺼져 버린 핸드폰 화면에는 충전이 필요하다는 표시만 뜬다. 지석은 심폐소생술 하듯 계속 전원 버튼을 누른다. 발을 동동 구르며 이미 누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가, 핸드폰을 바라보길 반복한다.

#14. 사무실 / 저녁

사무실로 뛰어 들어간 지석. 두리번거리며 철언을 찾는다.

철언 어라? 선배 아까 퇴근하시는 거 같더니 다시 오셨네요?

지석, 철언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다급하다. 거의 멱살잡이다.

지석 헉헉, 배터리…! 아까 빌려 간, 헉헉, 배터리 어딨어, 임마!

철언 네? 아…. 선배 책상에 올려놨어요. 제가 예정보다 늦게 복귀해서….

땀에 젖은 채 퀭한 눈의 지석. 철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언을 내팽개치고는 자신의 자리로 뛰어간다. 급한 손길로 보조배터리의 케이블을 핸드폰에 꽂아 넣는다. 그 바람에 철언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떨어지고 만다.

지석 하아….

안도의 한숨. 골룸이 열망하던 절대반지를 손에 넣었을 때의 표정과 같다.

철언 서, 선배 괜찮으세요?

철언의 말에 지석이 고개를 돌려 철언을 바라본다. 지석의 얼굴은 다크서클에 땀이 흥건하다. 철언, 흠칫 놀란다. 잠시 숨을 돌린 지석은 보조배터리가 연결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다시 사무실을 박차고 나간다. 벙찐 철언.

#15. 레스토랑 / 저녁

도희는 손목시계를 본다. 7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작게 한숨을 쉬는 도희. 핸드폰 화면을 살펴보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다.

그때, 지석이 헐떡이며 레스토랑에 도착한다.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도희를 먼발치에서 확인한 후, 습관처럼 핸드폰을 다시 확인한다. 오는 동안 어느 정도 충전이 된 핸드폰. 지석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다시, 모두 제자리다. 지석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주머니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지석을 발견한 웨이터가 그를 도희에게 안내한다. 지석이 자리에 앉으며 변명을 시작한다.

지석 도희야, 내가 진짜 일찍 출발했는데….

도희 아니야, 오빠. 오빠 요즘 바쁘잖아. 괜찮아. 뛰어오느라 목 마르지? 물 먼저 마셔. 여기 물 한 잔 따라 주세요.

지석 미안해.

도희 에이, 괜찮아! 배고프니까 빨리 시키자!

도희는 기념일을 망치고 싶지 않다. 인내심을 발휘한다. 웨이터를 불러 지난 30분간 몇 번씩 곱씹었던 메뉴를 주문한다. 미안해하는 지석을 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일상을 얘기한다.

도희 나 오늘 되게 웃긴 일 있었다? 저번에 말했던 동기 언니 있잖아. 왜, 희진 언니라고. 그 언니랑 오랜만에 점심 먹고 커피 마시러 카페 갔는데, 그 카페에서 글쎄 희진 언니 옛날 남자친구를 딱 만난 거야.

도희의 얼굴을 보며 끄덕이는 지석. 하지만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다. 지석은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손이 바지 주머니 속으로 슬며시 들어간다. 흔들리는 지석의 눈빛.

도희 (깔깔 웃으며) 하여튼 그 언니 없으면 회사 다닐 맛 안 날 거 같다니까. 그 언니 진짜 웃겨.

지석 아, 진짜네…. 그러네. 되게 재밌으시네. 하하하.

지석의 어색한 반응에 도희는 지석의 눈을 유심히 본다. 약간 표정이 굳는다.

도희 오빠.

지석 어?

도희 오빠 지금…내 말은 듣고 있어? 집중하는 거 같지 않아.

지석 어? 아니야, 잘 듣고 있어. 회사 선배…아니 동기랑….

지석이 말을 얼버무리자 도희의 표정은 완전히 굳는다.

도희 진짜 서운하게 왜 그래, 오빠. 지금 나 말고 뭐가 중요한데? 무슨 생각하는데?

지석 아니야, 도희야.

도희 뭐가 아니야? 무슨 중요하고 급한 일 있어? 응? 말해 봐봐.

지석 도희야, 아니야.

계속되는 지석의 부정에 도희는 한숨을 쉰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가라앉는다.

도희 아니면 전화 올 사람이라도 있어?

지석 아니…….

지석이 시선을 피한다. 도희의 마음은 차갑게 식는다.

도희 (딱딱하게) 그럼 뭔데? 뭐가 그렇게 나보다 더 중요하냐고!

도희의 말에 지석도 기분이 상한다.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테이블 위 와인이 출렁인다. 덜덜덜덜덜…. 테이블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지석은 떨리는 다리를 멈추어 보려 한다. 쉽지 않다. 테이블의 진동을 느낀 도희가 지석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는 걸 발견하고 만다. 도희가 냉정하게 말한다.

도희 또 핸드폰이야? 핸드폰 줘 봐.

지석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핸드폰은 왜.

도희 떳떳하면 핸드폰 줘 봐. 한번 확인해 보게. 왜. 못 줘?

지석 그거야…내 핸드폰은….

도희 핸드폰은 뭐?

도희가 손바닥을 펴 지석에게 흔든다. 지석은 숨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지석 핸드폰에…(뒷말은 들리지 않는다).

#16. 자료화면—핸드폰 속 원형

파란색이던 원형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점점 빠르게 뛴다.

#17. 레스토랑 / 저녁

지석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눈빛이 싹 바뀌어 있다. 무시무시한 표정. 독기 어린 살인마 같다.

도희 (당황한 듯) …오빠?

지석 야. 너.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매일매일 주식정보 입수해야지, 고객새끼들 안 삐지게 관리해야지, 팀장 그 개새끼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 문자질에, 데이터는 매일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아무것도 없는 그지 집안에서 이 정도 벌어 쳐먹을려면 이 개 같은 핸드폰을 자석처럼 손에 딱 붙이고 있어야 한다고!

거의 으르렁거리는 지석. 지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다희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지석 뭐?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넌 너만 생각하지? 야. 내가 요즘 바쁜 거 알면 연락은 좀 작작해야 되는 거 아니냐? ‘오빠, 오늘은 어쨌고, 내일은 어쩌고~’ (피식 웃는다) 내가 네 쓸데없는 얘기, 하나, 하나, 다 들어줄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네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연락만 안 해도 내가 눈알 빠지게 폰 보는 시간 절반은 아낄 수 있어! 내가 바쁜 줄 알면 연락은 좀 상황 봐 가면서 하라고!

지석은 속사포처럼 내뱉고도 울분이 덜 풀린 듯 테이블을 내려친다. “쾅!”

레스토랑 안은 한순간 고요해진다. 숨죽인 사람들이 지석과 도희를 쳐다본다. 경악과 공포로 압도된 도희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이 한 방울 톡, 떨어지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평소였으면 바로 따라 나갔을 지석이지만, 웬일인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씩씩거리고만 있다.

잠시 후, 지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여유로운 표정이다. 다른 한쪽 주머니에서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낸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신나는 스윙재즈 음악을 재생한다.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른다. 노래가 절정에 다다르자 크게 따라 부른다. 지석의 얼굴 점점 클로즈업. 자유와 해방감을 얻은 듯한 표정이 화면에 가득 차면, 지석이 큰 소리로 웃어 제낀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은 미동도 없이 지석의 반주 없는 노래를 듣는다. 엉망이다. 어느 사이 지석의 뒤로 다가온 웨이터가 지석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웨이터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나가 주세요.

#18. 자료화면—핸드폰 속 원형

파란색이던 원형은 이제 선연한 붉은빛을 띠고 있다. 흥분한 심장처럼 쿵쾅쿵쾅 뛴다.

#19. 지석의 오피스텔 / 오후

소파에 앉아 있는 지석. 안경도 쓰지 않은 눈은 눈물범벅이다. 소파 아래에는 소주병이 뒹굴고 있고 집 안은 엉망이다. 지석은 멍하니 흐린 눈을 하고 핸드폰으로 도희와 찍은 사진을 천천히 넘겨 본다.

사진 한 장이 나올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그러다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오래 머무른다.

잠시 망설이던 지석은 전화를 건다. 통화 연결음만 계속되고, 도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절망한 지석의 표정. 그 원망을 핸드폰으로 보낸다.

지석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지석은 핸드폰을 방구석으로 던져 버린다.

곧이어, 무생물을 상대로 괜한 화풀이를 했단 생각에 자괴감에 휩싸이며 소파에 드러눕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어라? 그런데 손에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방금 던지지 않았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본 지석은 당황하고

다시 핸드폰을 던지려는데,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팔을 마구 흔들어 보지만 핸드폰은 마치 자석처럼 지석의 손에 딱 붙어 있다.

안간힘을 쓰는 지석. 발까지 쓰자 겨우 떨어진다. 두려움에 휩싸인 지석은 핸드폰을 발로 밀어 버린다.

그런데, 핸드폰은 강한 S극에 딸려오는 N극처럼 스스로 움직이더니 오른손에 붙어 버린다!

지석은 이제 핸드폰을 제어할 수가 없다. 핸드폰이 지석을 통제한다. 핸드폰은 온 집 안을 휘젓고 다니고, 지석은 힘없는 인형처럼 딸려 다닌다.

마침내 현관을 박차고 나간 지석. 아니, 핸드폰. 지석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채 핏줄이 서 있다.

#20. 계단 / 오후

현관에서 뛰쳐나온 지석.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뛰어 내려간다. 아슬아슬,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험해 보인다.

#21. 도로 / 오후

지석은 핸드폰에 의해 어디론가 정처 없이 달려간다. 골목을 따라 쭉 달리자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나온다. 지석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오른다.

지석 떨어져! 내 손에서 떨어져! 제발!

“쾅!” 큰 소리가 나며 지석은 차에 치인다. Fade out.

#22. 자동차 안 → 밖 / 오후

Fade in. 운전자(53세, 남)가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놓고, 벌벌 떨며 차에서 내린다.

운전자의 얼굴 클로즈업. 그런데, 얼굴에서 두려움이 점차 가시고 의아함으로 가득 찬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석이 쓰러져 있어야 할 곳. 그곳에 아무도 없다. 핸드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큰 소리를 듣고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각자 핸드폰을 꺼내 피해자가 사라진 사고 현장을 찍고 있다. 한 고등학생(17세, 여)이 친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고등학생 야야, 찍었냐? 치인 사람이 사라졌어! 대박! 이거 유튜브에 올려야지! 아까 날라가는 것부터 찍었어야 하는데…. 와, 쒸…!

#23. 경찰서 내부 / 점심

지퍼백을 든 형사 1(35세, 남)이 천천히 서 안으로 들어온다. 서에는 형사 2(38세, 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형사 2는 지석이 사라지는 모습을 찍은 영상들을 재생 중이다. 형사 1,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는 형사 2의 책상에 지퍼백을 가볍게 던진다. 지퍼백 안에는 지석의 핸드폰이 담겨 있다.

형사 2 뭐야? 이거 그대로네? 잠금 못 푼대?

형사 1 요즘 핸드폰 보안이 워낙 강해서 어렵다네요? (입맛을 다시며) 그쪽에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데…. 수사도 지지부진한데 계속 이것만 잡고 있기도 좀…. (형사 2의 눈치를 본다) 근데 다들 어디 갔어요?

형사 2 점심 먹으러 갔지. (사이) 야, 우리도 일단 먹고 하자. 영상만 보고 있으려니 죽겠다.

형사 2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형사 1은 힐끔 지퍼백 속 지석의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형사 2를 따라 나간다.

#24. 자료화면—핸드폰

형사 1, 2가 나가자마자 지퍼백 속의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켜지고, 화면에 환하게 웃고 있는 도희의 얼굴이 뜬다. 잠금이 스르르 풀리고, 지석과 도희의 행복했던 장면들이 짧게 짧게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긴장한 표정의 지석이 등장하자, 영상이 재생된다.

지석 도희야, 오늘 5주년 기념일! (긴장한 듯) 후…. 프러포즈를 하려고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영상편지를 준비해 봤어. 우리의 지난날들을 편집했는데, 어때?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동안 항상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이 영상을 보고 있을 즈음엔 내가 벌써 너에게 반지를 건넸겠구나. 주머니에 있던 반지는
떨지 않고 잘 꺼내 주었으려나? (짧게 웃는다) 도희야. (진지하게) 부탁해. 내 마음 돌려보내지 말고…… 앞으로 영원……아껴……랑하고……고맙…….

뒤로 갈수록 노이즈가 심해진다. 결국 노이즈가 화면을 뒤덮으면 잠시 파란 원형이 등장한다. 이내 파란 원형도 작아지면서 까만 화면으로 가득 찬다.

#25. 자료화면—엔딩크래딧
#26. 쿠키—경찰서 내부 / 점심

지석의 핸드폰이 꺼진 채 지퍼백에 담겨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천천히 줌 인. 화면에 핸드폰이 클로즈업되었을 때, 화면 오른쪽에서 불쑥 손 하나가 나와 지석의 핸드폰을 낚아챈다! 화면 너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점점 작아진다.

끝.

김종빈 | JB Kim the Composer. 영화·영상·게임 등 여러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 영화 「매드맥스」를 좋아한다. instagram.com/@jbkimcre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