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국영 edited by 송산호
A와 접선하기로 한 장소는 서울 근교의 24시간 순대국밥집이었다. 약속한 시각으로부터 1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야근이 길어지고 있다는 짧은 문자를 뒤늦게 확인한 뒤 늦은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갓 내온 국물에 공깃밥을 엎고 뒤적거리는데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와 다를 바가 없네. 씨팔, 이거 완전히 말아먹게 생겼어.
존경하는 A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갑작스럽게 메일을 보내게 되어 몹시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3년 전 XX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D입니다.
언젠가 사석에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네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혹시 텔로미어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부분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합니다.
염색체는 세포가 분열할 때 형성되는 막대형 구조물이며 세포 분열은 그러니까…
세포가 분열함을 의미하겠죠.
요는 이렇습니다.
우리 몸속에서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진다고 합니다.
짧아지고 짧아지다 못해 쪼개질 데까지 쪼개지고 난 텔로미어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세포는 분열을 멈추거나 죽어 버리는 것이죠.
이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노화와 죽음의 전말입니다.
이론상으로 텔로미어를 길게 타고난 사람은 수명 역시 길고 아닌 사람은 짧다는 말입니다.
선생님. 요즘 저는 이른바 창작욕이나 창의성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어쩌면 어떤 세포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날 적부터 막대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짤막한 토막 모양의 텔로미어를 타고나 버린 듯합니다.
저의 토막은 고된 습작기를 버텨내어 주고는 임무를 다해 버린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A에게 보냈던 메일에는 워드 파일 하나가 첨부돼 있었다. 파일명은 〈내 인생의 악당들에 관하여〉. 등단 이전에 완성한 나의 가장 사랑스럽고 졸렬한 태작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A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작품이 필요했다. 도저히 손을 쓸 수도 눈뜨고 봐줄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른 주제에 작가의 애정만큼은 뚝뚝 묻어나는 개떡 같은 소설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A와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작품의 훌륭한 성취 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씨팔.
식사를 마친 뒤 수육과 소주를 주문했다. A는 과연 신뢰할 만한 인물일까. 허무맹랑한 도시전설 하나에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용한 점쟁이에게 신점을 보러 온 카톨릭 사제라도 된 기분이군. A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소설가들의 술자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마른안주거리였다. 그는 처참하게 망한 소설을 명작으로 탈바꿈시켜 준다는 전설로 유명한 편집자였다. 최근 문단에서 화제가 되는 단편소설들은 모조리 그의 손을 거쳤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워낙 외골수인 탓에 자신이 속한 출판사는 물론이고 작업을 함께한 작가와도 타협을 보지 않아서 입방아에 오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살벌한 부침 끝에 일을 그만두고 어디 산이나 절로 들어갔다고도 하고 어떤 독립출판사로 적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어느 술자리에서 A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 나는 취기를 빌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잘한 짓일까? 올바른 판단을 내릴 명석함도, 끝끝내 내어 주어서는 안 될 자존심 비슷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촉박하다. 마감은 미룰 대로 미뤘고 대안은 없다. 신작을 쓸 수 없다면 완성해 둔 작품을 고칠 수밖에.
등단한 뒤부터 신작을 완성할 수 없었다. A에게 보낸 메일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모든 열정과 재능이 갑작스레 동이 나 버린 듯했다. 원고 청탁을 받기만 하면, 막상 일이 닥치면 만사가 능히 풀리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간 문인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알음알음 끼거나 각종 시상식 뒤풀이에 참석해서 코가 비뚤어지다 못해 360도로 돌아 원상태로 돌아올 지경으로 술이나 퍼마셨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한 문예지에서 첫 원고 청탁을 받았다. 통설에 의하면 단편소설로 등단한 소설가는 바로 그다음 발표하는 작품에 문운이 걸려있다고들 한다. 미신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신인 작가의 역량이 가늠되는 중요한 기회이기에, 문단에 주목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가 이번에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 글을 써온 세월과 앞으로 다가올 작가로서의 삶이 모조리 걸렸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쓰든 그럴싸한 작품을 발표해 내야만 한다.
“암세포는 분열을 마쳐도 텔로미어가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주를 한 병 비울 때쯤에 나타난 A가 건넨 첫마디였다.
“텔로미어의 모양을 두고 막대나 토막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닳는 것에 가깝죠.”
야근을 하고 왔다는 그의 옷차림새는 어째선지 아웃도어였다. 아우터에 달린 후드를 뒤로 젖히자 빗물에 젖은 장발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악수를 한 뒤 A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수육을 한 점 집어먹고 점원이 내온 잔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작품은 잘 읽었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작풍이더군요. 순진한 위악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비아냥인지 감탄인지는 모호했지만 그 한 마디로 그가 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소설을 내보인 일도 하물며 평가를 직접 들은 것도 간만이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어쩐지 예민해졌다.
이번에는 내 삶의 악당들에 관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가장 악랄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 인생의 악당들에 관하여〉의 화자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만난 세 명의 악당들에 관해 차례로 이야기한다. 따돌림, 학교폭력, 청소년 비행에 관한 뻔한 서사. 종내에는 피하고 피하다 끝끝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진짜 악당,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토로하고 마는 것이 작품의 골자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화자는 속에 증오를 품고 그 부피를 키운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자 표적을 잃고 혼란에 빠진다. 소설은 화자가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듯한 성장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내 습작 중에서는 드물게 가족과 성장을 소재로 삼았다. 과몰입을 해 버린 탓에 자기객관화에 실패한 단편소설인데 동료들 사이에서 악평을 들었음에도 자꾸 눈에 밟히고 손에서 잘 놓이지 않아 몇 번이나 수정하려다 실패한 애물단지다. 굳이 이 작품을 A에게 선보인 이유는 물론 그의 구미를 당길 만큼 실패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작을 써내지 못하는 이유와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한몫했다. 인과를 설명하긴 힘들어도 이 창작적 정체의 근원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늘 이 작품이 마음에 걸리곤 했다.
“남성성 서사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악당이라 이름 붙은 이들은 모두 이른바 수컷으로서, 화자의 자격을 위협하고 박탈하려고 하죠. 하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악당들의 등장은 에피소드의 나열로 소모될 뿐입니다. 구성이 지나치게 규칙적이라 이야기가 단순해진 것입니다. 악당을 하나하나 클리어할 때마다 순차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성장 방식은 너무 익숙합니다. 반면 결말부, 가장 막강한 악인인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주인공은 어떠한 진전도 보이지 못하고 도입부와 정확히 같은 수준에 머무릅니다. 성장이 인물의 정서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행위라고 할 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성장과 무관한 성장 소설이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A가 분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사의 구조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물의 정서, 주제 의식을 헤집는 그의 견해는 매서웠다. 나도 잊고 있었던 연출점까지 짚어 버리는 바람에 취기가 달아났다. 명창을 앞에 둔 얼뜨기 고수처럼 간간히 추임새를 넣듯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엇박자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었다.
“가장 큰 패착은 화자가 아버지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
별안간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A의 말이 처음으로 뚝 끊겼다. 당황한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작 당황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무슨 엉뚱한 소리지? A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소설 속 화자의 표면적인 태도와 하부적인 감정이 심각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보십시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대체로 그런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나, 아버지의 손끝에 걸린 채 타들어 가는 담배… 좀처럼 아버지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날더러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며 골리거나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묻던 숱한 밤들과 만화영화를 틀어놓은 TV를 야구 중계방송으로 바꿔 버린 일들 같은. 기억들이 범람하고 있다. 괴로워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자, 화자는 아버지를 마주하는 대부분의 경우 눈물을 흘립니다. 그 이유에 관해 명시돼 있지는 않습니다만 맥락상 가정 폭력의 뉘앙스가 짙습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상처 입은 사람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습니다. 공포나 증오, 그렇다고 애증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강한 척 위악을 부리는 화자는 실은 아버지 앞에 언제든 무릎을 꿇고 눈물을 철철 흘릴 것 같은 미숙한 상태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화자는, 아니 어쩌면 작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A와 대화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자각이 없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함의를 심은 지점은 있습니다. 가령 이 문단을 예로 들자면…….”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유효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숨기고 싶은 것인지 드러내고 싶은 것인지 모호합니다. 이래서야 꼭 소설로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으로 비치진 않을까 염려되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A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상됐다.
“이 작품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A 사이에 한동안 말 대신 술잔이 오갔다. 빗발이 약해지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매장에 새로운 손님은 없었다. 두 번째 술병이 점차 비워졌다. A가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하자 입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 같은 대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어떻게… 방도가 없겠습니까?”
A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의사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가로젓지는 않았다. 다만 비어 있는 두 잔에 잠자코 술을 채웠다. 결론을 이렇게 낼 것이라면 애초에 답장이라도 하지 말던가.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 전설의 편집자? 억하심정이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A가 하나의 작품과 한 사람의 작가를 대하는 최선의 태도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가 심기를 거슬렀다. 마치 나보다 이 작품에 대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오만함. 불쑥 쏘아붙이고 싶었다. 이 소설은 그런 게 아니야. 당신은 오독했어.
“먼 길 오셔서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미안합니다 작가님.”
A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서늘한 얼굴을 하고 이 소설은 이러저러하고 그래서 안 된다고 늘어놓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냉혈한 혹은 호전적인 고집불통일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할 말을 모두 마친 A는 나를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애초에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라는 것이 마냥 편할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단지 그 이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타고난 성정인지 편집자로서의 모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의뭉스러운 다정함 덕에 내가 이 자리에서 A를 만나고 있는 것일 테지. 치욕이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치부를 생판 남에게 지적당하는 수준을 지나서 동정받는다는 것. 더군다나 그 지적이 당최 납득되지 않을 때 택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는 적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느라 진땀을 빼거나 혹은 소리를 빽 지르거나.
그러나 나도 A가, 내 소설을 읽어준 편집자가 어려웠다.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개썰매를 타고 나타난 이누이트 족과 벌거벗은 채 대면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좋은 가르침을 받았는걸요. 어떻게, 옮기신 회사는 괜찮으신가요.”
“조금 외진 곳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좋습니다.”
진흙이 묻은 트래킹화를 내려다보는 A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네 병째의 소주를 주문했을 때 나와 A,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만취한 상태였다. 나의 언성은 높았고 A는 낯빛이 불콰했다. 우리는 내일을 포기한 것처럼 빠르게 술병을 비웠다. 실제로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이제 와 청탁을 고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급한 대로 도저히 뭐가 문제인지 납득되지 않는 이 호로 새끼 같은 작품을 그대로 송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의 기분을 더럽히는 사실은 막상 발표되고 나면 평론가와 독자들이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비참한 기대를 놓아버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한편 A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혹은 습관인지는 몰라도 자꾸 얼빠진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눌 이야깃거리는 제한적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음악. 그리고 그거면 텅 빈 수육 접시를 대신하기에 차고 넘쳤다. A는 보기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워낙 달변가였기에 스타 강사의 강연에 빨려들어 가는 고시생처럼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남긴 말을 알고 있습니까?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한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평을 쓰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이던가요. 어디선가 그 말을 읽고 한 대 후련하게 얻어터진 기분이 됐달까… 결심이 섰죠. 책을 만들자. 그런데 작가님,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저는,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선생님 같은 분이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술에 취한 A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점차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에 취해 술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서로의 직업이나 입장의 격차라는 불편함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고 격앙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그즈음부터였다. 지나가는 투로 흘린 나의 요청이 A를 자극하고 말았다. 나는 A가 쓴 소설이 있다면 꼭 읽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A가 정색을 했다.
“복수가 하고 싶습니까?”
처음에는 아니, 잘 나가다가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술이 많이 됐구나. 적당히 수습해야겠어. 그런 마음이었다.
“자신 없으세요?”
잘 나가다가 내가 왜 이러나. 술이 많이 됐구나. 하지만 완전히 잠재웠다고 믿었던 속내가 한 번 입 밖으로 삐져나오자 멈출 수가 없었다. 토악질 같았다.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지 않고는 끝내 줄 생각이 없는.
“본인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막상 본인이 나서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고 뭐 그런가요? 뭐? 소설로 부리는 어리광? 솔직한 것과 무례한 것 정도는 구분하시죠. 정 그렇게 대단하시면 직접 써 봐요. 막상 내 입장이 되면 생각처럼 될 것 같습니까?”
A가 마른세수를 했다. 양손을 내린 그의 얼굴에 총기가 어렸다. 어쩐지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당신 손에서 탄생했다고 해서 그 소설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시 그 악당 얘기로 돌아가 보죠. 악당에 관해 다루는 그 소설에 숨은 진짜 악당이 누구인지 압니까? 바로 당신이야. 작가와 화자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한 소설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 제가 낳은 자식을 부모가 이해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지.”
“나랑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뭘 안다고 떠들어!”
얼굴이 굳은 A가 상을 내리친 내 주먹을 바라봤다.
우리는… 나와 A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빈 잔을 매만졌고 나는 분을 삭이기 힘들어 씩씩거렸다. 명백한 반칙이었다. 작품에 관해 얘기할 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비겁한 변명. 어디서도 보인 적 없는 폭력적인 언동을 나의 작품을 읽어 준 편집자에게, 그것도 내게 아무런 책임이나 의리도 없는 초면에게 내보이고 말았다.
“아까 했던 조지 마틴 얘기 말입니다. <왕좌의 게임> 원작자인 조지 R. R. 마틴 말고 프로듀서 조지 마틴. 그는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몰랐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라는 원석을 기술적으로 갈고 닦아 비틀즈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였습니다. 그런 겁니다. 물론 좋아합니다. 소설. 직접 써 보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연출가로서, 지휘자로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작가가 못된 패배자로 몰고 싶어서 안달이군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노련하다. 이자는 그럴싸한 자기변호를 늘어놓는 일에 능하다. 그것도 내가 영 못 알아들을 소리로만 골라서 말이지. A가 떠드는 이야기를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쭉. 이 자가 오늘 나를 만난 진의를, 망발을 퍼붓기 알맞은 개떡 같은 소설들만 손보는 그 음험한 속내를 비로소 깨달았다. A는 그저 잘난 듯 주절거리고 싶었을 뿐이다. 책임질 까닭이 없는 대상을 하나 골라서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자기 얘기를 늘어놓으려는 심산이다. 그런 종자다. 자기도취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현학적 금치산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작품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이 이야기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야, 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는 직접 그 글을 썼으므로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고, 편집자는 여러 오류를 고치는 입장에서 이 글의 강점과 취약한 지점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책의 오류를 발견한 일부 독자들의 고압적인 태도에서도 어떤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미안합니다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뭡니까? 나는 그저 외부인입니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저자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 모든 순간이 나의 일이었지만, 만들어 낸 책에 내 이름이 실리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죠. 사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책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말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 책이 좋은 책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책을 단 한 권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나야. 알아들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자꾸 밑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머리통을 양손으로 받쳤다. A는 침묵했다. 얼마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을 느꼈다. A가 같은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은 나는 빗속을 헤치는 그의 뒷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는 저 멀리 산자락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술잔을 마저 비우고 테이블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 앉아 한 이야기의 구상을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꾸리려면 악당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없고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좋겠어.
주인공은 작가 D와 편집자 A. 하나의 작품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펼친다. 그러나 실상은 둘 다 작품과는 상관없는 각자의 얘기를 꺼내고 떠들다가 서로 상처를 주고 이해를 종용한다. 마지막에 그들은 각자 은신처로 몸을 숨긴다.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곳으로.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여야지. 이 또 한 편의 태작을 A에게 바친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거야. 이 작품은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가와 작품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난 이렇게 답할 테다. 당신이 한 번 써 보시지. 쉽지 않아. 존나 어렵다구. 맙소사. 더럽게 흥미로운 소설이겠군. 하지만 발표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난 이제 완전히 끝났으니까. 내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앞으로 악당에 관해서는 쓸 수가 없겠다.
정신을 놓고 잠에 빠지기 직전 아마 이렇게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암세포라니. 살벌하게. 투병하듯이… 씨팔.”
낯부끄럽게 도취된 자만이 뱉을 수 있는 독백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습작이었던 「내 인생의 악당들에 관하여」와 편집자가 「악당들」을 읽고 작성한 비평 코멘트, 우리가 주고받은 메일을 참조하여 쓰였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