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책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어떤 사람의 어떤 목소리가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고, 출판인이라면, 그것도 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지금의 출판인이라면, 무엇을 (무엇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해야 한다고.
최저임금을 받고, 야근수당을 못 받고, 부당한 지시를 받고, 상여급은 못 받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각자의 이유로 하나둘, 대여섯, 퇴사를 하고 나자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들 대신 회사에 나와 하루하루 버텨 가며 해야 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책 한 권을 만든다면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하고,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한다는 사람들의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출판이 아닌가? 이것은 왜 출판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부터 책을 덮기 전에 저작권면을 유심히 읽는 버릇이 들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어떤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정리한, 단 한 쪽의 페이지를 가만히 읽어 봅니다. 어떤 화두를 던질지 고민했을 편집자와 내용이 가장 적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다루었을 디자이너와 그 책이 올바른 자리에 놓이고 닿을 수 있도록 탐색했을 마케터를 생각합니다. 그뿐인가요. 회사 바깥에서 외주노동자로 일하는 사람, 의도에 맞도록 인쇄하고 종이를 묶는 사람, 발견한 책의 매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려는 사람……. 저작권면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과 이름이 실리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출판을 하는 사람보다, 나와 같이 출판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책에는 시작과 끝이 분명합니다. 마치 하나의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에는 시작을 알리는 서문도, 어떤 과정을 거칠지 귀띔해 주는 차례도, 어디쯤 왔다고 알려 주는 면주도 없습니다. 그저 끈질기고 지긋지긋하고 질리도록 계속됩니다.
「편않」 5호에서는 시작과 끝이 아닌, 우리가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지금의 출판노동을 담고자 했습니다. 출판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쓰는 출판노동자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이 만드니까요.